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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Oct 24. 2024

볶음밥

500원의 가치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는 무려 15년을 군만두만 먹었더랬지. 그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나 역시 한 음식만 주구장창 먹던 때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안나푸르나 라운드(서킷) 트레킹’을 할 때였다. 흔히 국민 코스라 불리는 불과 3박 혹은 4박 일정의 ‘ABC’ 코스와는 달리 총길이 200여 킬로미터의 긴 코스며, 난 라운드(서킷) 트레킹 + ABC까지 걸으며 20여 일을 히말라야에서 보냈다.


히말라야산맥을 등산하는 건 나의 버킷리스트 중 최상위 목표였다. 어렸을 적부터 수업 시간에 듣던 세계 최고의 산맥, 다큐멘터리나 여행 프로에서 정기적으로 틀어주던 히말라야의 거대한 산맥과 푸른 하늘은 내게 동경의 대상이자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히말라야의 광활한 대자연을 칭송함과 더불어 그 속에서 꼭 어떤 깨달음을 전했다. 

“하~ 정말 이렇게 어마어마한 대자연에 뚝 하니 떨어져 있으니, 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느끼게 됩니다. 와하하하하”

혹은 “하악... 하악...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서 결국엔 이렇게 정상에 오르네요. 세상만사가 다 이런 거 같습니다. 와하하하하.” 와 같은 다큐멘터리 출연자의 멘트는 애니메이션 속 성장형 캐릭터 주인공의 대사마냥 낯이 간질간질했다.      

나이가 들면서는 출연자의 가식적인 연기톤의 감상평은 애초에 내게 아무 데미지를 주지 못하며, 시니컬한 어른의 방탄 감성에 튕겨 나갔다. 하지만 영상에서 보이는 자연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실제였기에, 히말라야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드디어 난 네팔에,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에 왔다. 

“후아! 미쳤다! 이 미친 대자연! 난 진짜 한 마리 개미와도 같구나! 와하하하하!”

난 첫날부터 마뜩잖아하던 다큐멘터리 속 출연자처럼 말하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볶음밥 도르마무.      


산속 숙소를 롯지라고 불렀고 이는 나와 같은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했다. 방은 그저 사방이 막힌 공간에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그런 곳이었다. 대부분의 롯지는 숙소 비용보다는 식사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 구조처럼 보였다. 숙소비는 당시 고작해야 100루피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돈으로는 천 원 정도 되는 돈인데 밥값은 이보다 배로 비쌌으며 고도가 올라갈수록 밥값도 올라갔다.     

 

볶음밥 하나에 200루피에서 350루피까지 먹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산 아래에서는 고작해야 100루피 정도였던 거 같다. 하여튼 가난하기 그지없는 그지 같은 여행자였던 난 최상의 효율을 뽑아내기 위해 언제나 볶음밥을 주문했다.      


볶음밥 종류는 나름 다양했는데 야채, 달걀, 치킨 볶음밥은 서로 50루피씩의 차이를 보였다. 하... 그놈의 500원... 그 500원의 장벽이 왜 그리 커 보이던지.


그래서 난 어느 순간 롯지 주인과 협상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방은 대부분 2인을 위한 방이었고 난 혼자였다. 그리하여 주인에게 방값을 깎아 달라고 제안했다. 100에서 50루피로. 무려 50% 파격 할인을 말이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하면 대부분 “밥 우리 롯지에서 먹을 거야?”라고 되묻는다. 이에 난 “오브콜스!” “앱설룰리!” “당연지사!”를 외치며 협상으로 얻어낸 50루피로 치킨 볶음밥을 주문하곤 했다. 그리고 흔쾌히 방값을 깎아준 주인이 고마워 차도 한 잔 사 먹고 했으니 이게 바로 윈-윈 아니겠는가?     


롯지는 주로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나는 여행객들을 위해 전날 미리 아침 메뉴 주문을 받아 놓는다. 그러면 난 또 어김없이 볶음밥을 주문했다. 한국인은 자고로 밥심 아니겠는가?

이에 “정말? 볶음밥? 아침부터?”라며 되묻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른 아침 롯지의 식당 풍경을 보면 되물을 만하다. 서양인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서인지 대부분 커피나 간단한 빵 하나를 먹으며 아침을 준비한다. 그 사이에서 커다란 접시에 산처럼 쌓인 볶음밥을 퍼먹는 아시아인은 실로 이목이 집중될 만했다.     


그 당시 나 역시 반대로 서양인들을 보며 참으로 놀랬는데, 덩치도 나보다 크고 이제부터 커다란 배낭을 메고 걸어야 하는데 어떻게 저거만 먹지? 싶었다. 아침 볶음밥을 해치우곤 산행 도중에 점심으로 먹을 삶은 달걀과 찐감자까지 챙겨서 나가는 나. 서양인들이 보기엔 연비 엉망의 똥차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난 볶음밥의 힘으로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볶음밥은 나의 버킷리스트를 이룰 수 있게 해준 음식임과 동시에 500원의 가치를 일깨워 준 고마운 음식이다. 히말라야산맥에서의 볶음밥 맛을 어찌 잊겠는가. 감히 장담은 못 하겠다만, 다시 한번 쏟아지는 폭포를 바라보며 볶음밥을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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