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로 유랑할 때, 인생에 더하는 찬란함
2023년의 마지막 날, 나는 내가 가보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나라와 도시를 달리기로 누볐었다.
달리기를 막 시작했을 때, 흥미도 붙이고 정보도 얻을 겸 수많은 글을 찾아 읽었었다. 블로그 후기는 물론이요,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달리기’ 키워드로 검색해서 나오는 책들은 닥치는 대로 손에 넣고 눈에 담았다. 특히 그 책이 생생하고 진솔한 달리기를 담은 수필이라면 몇 번이고 정독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모든 글들에서 특히 반짝이는 대목을 발견했다.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마음 놓고 달리는 모습들을. 떠난 곳도, 달리는 곳도 다르지만 모두 찬란한 경험을 한 순간들을 아름다운 글에 싣고 있었다.
반타이즈 차림이라 연이틀 내린 비와 바닷바람이 조금은 쌀쌀했지만 아무도 없는 해변 데크를 달리는 상쾌함으로 충분히 보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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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역시 호사의 백미는 멀리 떠나 달리는 관광주(走), 여행주다.
- 김형준(2022). 달리기의 힘. 굿모닝북스.
비록 활자로 접해 한 발자국 떨어진 체험이었지만,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그들의 반짝이는 순간에 내 모습을 그려넣곤 했다. 그러다 달리기를 시작하기 바로 전 달에 떠난 제주도 여행을 떠올렸다. 올레길 2코스와 6코스를 완주하면서 하루에 4만 보를 걸었지만, 그 무수한 걸음이 달림으로 바뀐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후회되었다. 걷지만 말고 달려보기도 할걸, 편한 길도 많았는데……. 차후 여행지에서 달릴 기회가 생긴다면 무슨 일이 생겨도 꼭 달리기로 마음 먹고서 책을 읽어내려갔었다.
꿈 속 꿈, 상상 속 상상에서조차도 예기치 못하게 결정된 대만 여행이라 당혹스러웠던 마음도 잠시, 어렴풋하고 어설픈 결심을 감히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먼저 동행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일정 시작 전, 새벽에 달리고 오겠다고. 수락 답변을 받고, 결심을 넘어 사명감마저 들었다. 이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달려야 하기에.
3박 4일, 친구와 단 둘이 떠난 자유 여행인데다 친구가 자는 시간에 달리기로 해서 일정 조율은 비교적 수월했다. 목표도 ‘하루라도 좋으니 달리자’로 소박하게 잡아 마음의 부담도 덜했다.
둘째 날 아침에 눈을 뜨니 날이 흐렸다. 하지만 곧 비가 오리란 점을 알았다. 전날 안개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비가 내린단 생각에 오히려 설렜다. 여행, 타국, 우중주가 공존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참으로 귀한 경험이었다.
밖에 나오니 짐작대로 비가 내려 노면이 젖는 추세였다. 안개비와 보슬비를 오가는 비를 맞으며 몸을 풀고 달리기 시작했다.
숙소를 타이베이101 근처에 잡았는데, 국립국부기념관과 중산공원도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덕분에 달리면서 다양한 명소를 쉽게 방문할 수 있어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국립국부기념관을 지나 맞닥뜨린 이 도시의 랜드마크. 타이베이101은 짙은 안개 탓에 하층부만 볼 수 있었다. 더 달려 마천루 앞까지 다다랐는데도 안개에 가려진 상층부는 내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쉽거나 실망스럽진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내가 여기 있어서.
달리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내가 달려서 이 드높은 마천루 앞에 서다니, 평생 생각지도 못한 곳을 달리다니. 다른 세계, 다른 차원에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여권 없이 살다 처음 외국으로 나간 해에 해외여행을 세 차례나 할 줄 몰랐고 여행하면서 달릴 줄은 더더욱 몰랐다.
낯섦이 주는 자유를 온전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사진 촬영, 길 찾기, 달리기를 번갈아 하며 소위 ‘찍터벌’을 수행하다 음성 안내를 듣고 식겁해서 제대로 달렸다. 어차피 본 일정 때 다시 올 테니 사진은 그 때 찍자 생각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 특히 흰 타일 길이 매우 미끄러웠다. 자연스럽게 다시 찍터벌을 수행했다. 중산공원으로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편히 달릴 수 있었다.
이때까지 5km를 숱하게 달렸지만 유독 새롭게 다가왔던 까닭은 날씨에도 있었다. 아무리 다른 나라라 해도 12월이었다. 북반구에 사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한겨울과 연관짓게 되는 달에, 영상 두 자리 수의 기온에서 달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사진 촬영과 미끄러운 길에 신경을 쏟느라 달린 시간과 경과 시간의 차이도 컸고 평균 페이스도 들쭉날쭉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여행지에서 나만이 만들 수 있는 길을 만들며 달렸다는 사실이 몹시 뿌듯했기에.
그 다음날은 2023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전날의 성취를 발판으로 용기를 얻어, 낯선 도시에서 또다시 달릴 수 있었다. 해장주는 주말의 관례나 다름 없을 뿐더러 대만의 시차는 한국보다 1시간 늦기 때문에 달리기 수월했다.
또한 전날과 달리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맑은 기상에서도 달려보고 싶었으므로.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타이베이101도 선명하게 잘 보여 눈이 즐거웠고, 길도 마른데다 전날 경험을 토대로 타일 바닥을 피해서 달려 달리기 훨씬 수월했다.
이 날에는 전날처럼 국립국부기념관, 중산공원, 타이베이101 주변을 돌며 달렸다. 낮달을 보아 좋았고, 중산공원을 두 바퀴 돌며 연못을 비롯한 풍광을 더욱 자세히 살필 수 있어서도 좋았다.
이 날 달리기에서 가장 황홀했던 순간은 골목길 사이로 타이베이101을 본 순간이다. 무채색 골목과 푸른 하늘의 대조, 선명하고 낮은 건물 너머 새벽빛처럼 어슴푸레 보이는 마천루가 주는 감동이란!
여행지를 두 다리로 뛰어다니면 발자국으로 찍은 장소와 풍경이 가슴에 새겨진다.
더 많은 추억이 생기고 훗날 행복을 추억하는 시간도 많아질 것이다.
- 박태외(막시) (2021). 달리기는 제가 하루키보다 낫습니다. 더블엔.
두 해가 지난 지금에서도 단언할 수 있다. 이 달리기들이 이 때의 여행에서 가장 깊게 아로새긴 추억들이라고. 어떤 순간보다도 찬란하고 흡족했다.
‘할 수 있을까?’란 염려를 ‘하고 마리라!’는 각오로 바꾸었기에 해낼 수 있었다.
이 기억을 발판 삼아 나는 다음 여행지에서도 달리리라, 새로운 세상에서 더욱 행복하게-라고 마음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시에 느낀다. 삶은 여행 그 자체니까, 달리는 한 나는 매일 언제 어디서든 달리기로 마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고 있다고.
내가 달리는 한, 나는 계속 여행자라고.
그리고 이런 삶이 제법 마음에 든다고.
개인 사정으로 연재가 늦어져 죄송합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은 예정대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