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구할 수 있는, 나

어떻게든 달리기만 하면 돼

by 수립

작년 늦겨울,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했던 10km 대회가 있었다. 그로부터 3주 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10km를 더욱 잘 달리기 위해서였다.

대회 일주일 전, 내가 신청한 부문만 코스가 바뀌었다. 갑작스러웠지만 지난 광진구 마라톤의 언덕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쉬워진 코스 덕분에 여기서 개인 기록을 깰까 싶었지만, 실은 연습 삼아 가볍게 달리자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 신청 당시의 마음가짐부터 그랬을 뿐더러 궂은 날이 계속되는 상황을 빙자한, 테이퍼링을 가장한 자기합리화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 몸마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내가 자초하긴 했지만. 그주 초반의 과음과 과식으로 발생한 가벼운 장염은 대회날이 다가올수록 심각해졌다. 당일 아침에는 비염까지 겹쳤고, 날씨마저 비가 내려 우중충했다. 불참을 고민하던 차에 어떤 생각이 나를 내리찍었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하루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넌 뭣 하냐는 일갈이자 호령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대회장으로 향했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추웠다. 어쩔 수 없었다. 모두 내가 자초한 일. 겨우겨우 집결지에 도착해, 만나야 할 사람을 기다리면서 고가도로 아래 서 있었다.

촥!

지하철이 지나가는 순간, 고가도로에 고여 있던 물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찰나의 겨울비는 천둥과도 같은 비명을 불러일으켰다. 몸서리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깨달았다. 소리만 내지 않을 뿐 나도 그들과 같다는 걸. 축축한 옷섶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가득했다. 신기했다. 누가 내 마음을 하늘에 풀었나?


마음이 어떻든 할 건 해야 했다. 물품을 맡기고 고개를 드는데 마르고 훤칠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기다리던 분이었다. 그분께선 감사하게도 나와 함께 워밍 업을 해주셨다. 나보다 훨씬 춥게 입고 계신 모습을 보고, 춥다고 징징거렸던 게 죄송해졌다. 죄송한 만큼 힘내서 워밍 업을 마쳤다.


이 대회는 대회 주자들을 정해진 출발시간보다 일찍 출발시켰다. 이래도 되나 싶은 의구심과 괜찮으니까 이렇게 할까란 생각이 혼재했다. 솔직히 의구심이 더 컸다. 풀, 32km, 하프, 10km, 출발 간격이 다르더라도 수천 명이 다같이 같은 길로 달리는데……. 그저 달리는 모두가 무탈하길 바랐다.


드디어라고 해야 할까, 기어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나는 출발선을 뒤로 하고 앞으로 하염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뭔가 이상해서 내려다보니, 종종 고장나던 바람막이 지퍼가 또 말썽을 부려 옷섶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달려야 하는 점은 변하지 않으니, 그저 달렸다.

뚝섬 구간은 상당히 좁다고 알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이들이 연신 출발해도 괜찮을까 의문을 품자마자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누군가 나의 왼편을 들이받았다. 추월하려다가 부딪힌 듯했다. 다행히 둘 다 넘어지지 않고 계속 달렸다.

이쯤 되니 오히려 초연해졌다. 이미 질병이든 추위든 다 끌어안았으니, 완주만 하자는 마음으로 계속 달렸다. 즐기려고 노력하면서. 하지만 역시 힘들어서, 다른 대회에서는 지나치던 급수대를 이번 대회에서는 모두 방문했다. 2.5km마다 만나는 물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어김없이 목이 말랐고 지쳤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실전을 연습으로 간주하자며 달렸다.

이유를 막론하고 내가 선택한 대회다. 상태를 막론하고 일단 선택했으면 책임져야 한다. 선택의 무게는 책임의 무게와 같다. 그 점을 유념하면서, 최악의 러닝에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NRC 가이드의 말을 떠올리면서 달렸다.


이번 대회는 놀랄 만큼 일정한 속도로 달렸다. 1km마다 듣는 음성 피드백이 다행히도 5분 40초라 일러주었다. 때마침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나 즐기는 대회라 다행히 주로를 촬영할 수 있었다.

이 풍경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어 감사하단 생각과 동시에 새 힘이 솟아났다. 달리는 사람들이 보든 말든 파이팅을 외치며 달렸다.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오길 잘 했다. 오늘 나를 최악의 상태로 만든 사람도, 그런 상황에서도 끝내 달려낸 사람도 결국 나다,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생각들을 원동력으로 삼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여러 의미로 감정을 끌어올리던 대회가 끝났다. 목표는 당일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꿈결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였고, 작년에 달린 대회보다 컵라면 한 개를 끓일 시간만큼이나 느려졌지만 괜찮았다. 그냥 완주해서 감사할 뿐이었다. 순간의 기록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여건이 어떻든 나는 달릴 수 있다. 어떻게든, 얼마나 걸려도 목표한 대로 완주할 수 있다.

잊지 않기로 했다. 지금도 잊지 않으려 한다.

내가 검푸른 절망 속으로 침잠할 때, 나를 끌어올린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아주 운 좋게도, 나는 오래지 않아 이 말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 있었다.

겨울의 내가 봄의 나를 구했으니까.


자꾸 늦어 죄송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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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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