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은 몰입이었다.
한 해의 시작,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시간. 귀국하느라 썩 달리기 수월한 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해 첫날에만 주는 배지를 꼭 얻고 싶었다. 이날을 놓치면 삼백예순네 번의 밤을 기다려야 하니까. 아, 2024년은 2월 29일까지 있으니 삼백 하고도 예순 다섯 밤이지.
도저히 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아 집 앞에 캐리어를 놓고 1분가량 달렸다. 그리하여 단 60초의 움직임으로 3153만 6천 초의 기다림을 막아냈고, 새해부터 작은 실천이 주는 큰 성취를 누렸다.
이틀 후부터 2024년의 본격적인 달리기를 시작했다. 새로운 해의 새로운 기운을 받은 까닭인진 몰라도 이 날부터 달릴 때 몸과 마음이 편했다. 날아갈 듯한 기분에 심박수도 덩달아 솟구쳤지만, 어쨌거나 내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그다음 주에는 상황이 급변했다. 굳이 변명하자면 달리기의 난이도를 높이는 요소들이 많았다. 궂은 날씨, 길거리에 개장한 스케이트장,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족저근막염 등. 물론 가장 큰 요소는 내 마음가짐이었다. 달리지 않았던 날에 심한 자책감을 느꼈지만 그뿐이었다. 나가서 단 한 발짝만 내딛으면 그다음부턴 아무것도 아닌데, 알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달리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하는데도.
그 주 일요일에는 비와 눈이 연달아 내려 달리기 몹시 어려운 날이었는데도, 블로그 이웃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달렸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보다 스스로의 성장에 집중해야 여러 모로 이롭겠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을 보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특히 토요일, 날씨가 화창하고 좋았던 그날에 달렸더라면 그다음 날 눈비가 몰아치는 창 밖을 보며 후회하거나 다른 이들이 달린 기록을 보며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그래도 인생사는 새옹지마 아니던가? 늘 좋거나 나쁜 일만 계속되진 않는다. 어쨌거나 난 달리기를 완전히 그만두진 않았기에, 그다음 주에는 당연히 달렸다. 그리고 그렇게 달렸던 날에는 행복하고 뜻깊었다. 모든 날에 자세와 시선을 유념하며 편하게 달렸다. 그 주 목요일에는 중반에 미끄러운 곳을 피해 다니느라 누군가 발목을 잡아끌듯 페이스가 처져 살짝 심란했지만 몸은 안정적으로 잘 달렸다.
이주에 특기할 만한 사항은 첫 설중주를 진행했다는 점이다. 1km를 막 지났을 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눈으로 바뀌었다. 중간에 우박도 내린 덕분에 어떤 글에서 읽었던 ‘우박 소리를 들으며 달리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전반적으로 싸락눈이라 달리기 어렵지 않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또한 ‘동네 탐험 달리기’를 진행했다는 점에도 의미를 둔다. 역사 속,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찾아 헤맸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본인 또한 얼지 않은 땅, 미끄럽지 않은 길을 찾다가 우연히 벌어진 일이었다. 같은 동네면서도 달리지 않았던 곳들을 달리며 동네 지리를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평소 대수롭잖게 스쳐 지나던 골목이 너무나 익숙한 장소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신기함과 놀라움을 느끼기도 했다. ‘익숙함 안에서 새로움을 찾다’는 달리기에도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이었다.
맑은 날씨와 그나마 뽀송한 땅이 반겨주던 어느 수요일, 모처럼 마음에 드는 달리기를 했던 날, NRC(Nike Run Club)의 결과창이 다른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간 보던 형광초록빛이 아니라 밝은 파랑에 가까운 하늘빛이.
아, 나도 이제 블루 레벨이구나.
고대해 왔던 순간이었지만 상상만큼 기쁘거나 설레진 않았다. 드디어 이뤘다는 안도감만 들었다. 꾸준히 달리다 보면 언젠가 달성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푸른색으로 바뀐 UI를 바라보며 돌이켰다. 달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과거를. 아마 그때의 나는 10개월 남짓한 시간에 1000km를 달리리라곤 평행 세계의 자신조차도 시도할 리 만무한 일이라 여겼을 터였다. 그걸 해내고, 앞으로도 계속 달려서 언젠가 마지막 레벨인 볼트에까지 다다르리라 마음먹었으리라곤 더더욱.
더 열심히 하겠다 다짐한 바로 다음날부터 거짓말처럼 달리기 어려운 날이 이어졌다.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급감하며, 체감온도는 무려 영하 20도에 달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도저히 밖에서 뛸 수 없어 난감해하던 차에 매일 트레드밀에서 달리는 블로그 이웃이 떠올랐다. 그분을 본받자 결심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호기롭게 도전지만 사실 실천율은 썩 좋지 못했다. 트레드밀은 어디까지나 밖에서 달릴 수 없을 때를 위한 대비책이었기에, 밖에서 달릴 여건이 되는 날에는 그렇게 하느라 헬스장에 방문하지 않았다. 그래도 방문하는 날에는 성심성의를 다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트레드밀 달리기는 몹시 힘들었다. 내 주법이 미숙한 탓이겠지만 밖에서 달릴 때보다 속도가 느린데도 더욱 버거웠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어정거리는 느낌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속도를 ‘10’에 맞추고 달리면 페이스가 6'00"이라는 점을 잘 아는데도 체감상 페이스가 때로는 몇십 초나 빨랐다. 처음 1km를 달렸을 때 평소 페이스보다 확연히 느린 결과를 듣고 나름대로 만회하려 발악한 탓일지도, 스멀거리며 피어오른 지루함이 어느 순간 나를 에워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트레드밀에서 넘어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상상을 한 까닭일 수도 있겠다.
추측은 다양하지만 확신은 하나로 귀결된다. 이런 상념들이 무용하다는 사실로.
그러다 몸살 때문에 달리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었다. 달리지 않는 동안 머릿속에서 무수한 생각들이 맹렬하게 전투를 치렀었다. 이제 하루에 몇 km만 달리면 월 100km 달리기를 해낼 수 있다는 계산, 즐겁자고 하는 일인데 거리에 얽매이지 말자는 회유 겸 유혹, 나가야 한다고 되뇌면서도 안주하는 안일함…….
이유가 천 가지라도 뛰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웃긴 건, 달리기를 완전히 접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오랜만에 겨울치고 날이 매우 화창하고 기온도 포근했던 날이 찾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밖으로 뛰어나갔다. 늘 달리는 천변으로 나갔다. 이제껏 달리지 못했던 다리까지 달려보고 싶었다. 익숙한 다리를 지나자 갑자기 바닥에 숫자가 나타났다. 숫자는 어떤 다리까지 남은 거리를 100m 단위로 표기하고 있었다. 2, 1.9, 1.8……. 0.1씩 줄어드는 숫자들이 완전한 0이 될 때까지 달려보고 싶었다. 힘차게 달리던 순간 귓가에 딱딱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평균 페이스, 오, 분, 이십, 사, 초.”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한편 놀랐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데 이렇게 편안하다고? 사뿐사뿐 날 듯한데, 혹시, 이게 몰입인가? 내가 지금 몰입하고 있나?
전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작가의 〈달리기, 몰입의 즐거움〉을 읽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몰입의 조건과 책에서 보았던 몰입 사례들을 떠올리며 스스로와 비교했다. 몰입의 ‘ㅁ’에는 도달했다 결론 내리자 더 즐겁고 힘이 나 행복하게 달렸다.
완전한 0을 만났다. 고대하던 다리에 도착했다. 달려서 세 개 구나 오간 적은 처음이라 신기하고 놀라웠다. 달리면서도 의심했는데 그저 기우였다. 평소 페이스보다 더 빨리, 더 멀리 달렸는데도 힘들지 않았다. 기쁨과 성취감과 별개로, 나는 그간 지레짐작해서 움츠러들고 있었단 생각이 들었다.
이날 결과는 믿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오롯이 달리기로만 한 시간을 채웠다. 페이스도 대회에서나 볼 수 있었던 페이스였다. 믿을 수 없는데 현실이라니, 내가 이렇게 달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스스로에게 종종 일갈하곤 했었다. 너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와중에도 더 오래, 빨리, 멀리, 많이 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저렇게 하는데 넌 왜 못하냐고. 귀한 비법들을 배워 적용하기도 모자랄 시간에 소모적인 자책만 되풀이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단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바꾸었다. 자책의 굴레를 성취의 발판으로 삼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고 배우면서 좋은 점은 열심히 내 것으로 만들고 마음을 다잡기로, 달리지 못한 날을 자책하기보다 다음에 더 잘 달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로.
무엇보다 달리기도 인생도 늘 변하기에,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기로.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바꿀 수 있다고, 적어도 달리기만큼은 내가 몰입한다면 원하는 대로 충분히 바꿀 수 있다고.
이날 몰입하는 달리기로 배운 생각과 느낌을 7천 명이 함께 달렸던 2월 말까지 간직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