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기특한 용기가 남긴 아주 커다란 흔적
달리면서 응원단과 자원봉사자들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주자들이야 달리면서 몸을 데울 테지만 응원단과 자원봉사자들은 차디찬 비를 맞으며 줄곧 제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본인들께선 달리지 않으니 이 궂은 날씨에 쉬고 싶으실 만도 한데 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계속 서서, 오가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응원해 주시며 최선을 다해 봉사해 주셨다.
나를 모르는데도 내 이름을 불러주며 응원해 주시는 분들께 보답하는 방법은 내가 더 열심히 달리는 일뿐이라, 달리는데 뒤에서 감탄이 들렸다. 내 싱글렛을 본 누군가가 옆사람과 대화하는 소리였다. 귀여운 강아지가 깃발을 들고 있네- 하고. 소중한 우리 크루의 싱글렛을 칭찬하는 말이었다.
훗, 아무렴요! 누가 만드셨는데요? 귀여운 순덕이 싱글렛을 바로 제가 입고 있습니다! 내가 만들지도 않았는데 어깨가 으쓱해지고 척추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군자역을 생각했다. 나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달려가야만 했다. 나를 기다리는 그들을 당당한 모습으로 찾아뵙고 싶었다. 그들의 안녕을 빌며 다시금 숫자를 읊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덜 춥길, 모쪼록 무탈하길 바라면서, 그동안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을 떠올리면서.
27, 28, 30, 35, 41. 다시 공식과도 같은 수를 세고 그에 대응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떠올리노라면 자연스럽게 모든 시작으로 되돌아간다. 첫 달리기를 떠올렸을 때처럼.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첫 10km 대회를 마치고도 나는 계속 달렸다. 새벽에 아직 지지 않은 달과 그 빛을 덮으며 떠오르는 태양도 보고, 새 신발을 신고 달려도 보고, 또다시 비가 오는 날에도 달리고, 처음으로 영하의 날씨에 달려보고, NRC(나이키 런 클럽) 어플에서 새로운 트로피도 획득하고,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는 대신 인터벌을 하기도 했고, 평소 달리던 길을 거꾸로 달려보기도 했고, 11km 대회에 나가 그간의 거리와 기록도 경신하고, 5km를 음악 없이 달려도 보고, 5km를 처음으로 25분 안에 완주해 보기도 했다.
나름대로 다양하게, 아주 재미있게 잘 달렸다. 그렇지만 나는 늘 혼자였다. 연속 9개월 동안 월 누적거리 100km 달성을 이어가면서도. 나는 사람을 반기는 성격도 아니고 살가움과의 거리는 대한민국 종주 울트라마라톤 거리만큼이나 먼 사람이다. 혼자 달리는 일이 당연하다고 여겼을뿐더러 굳이 여럿이 함께 뛸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다. 누군가와 같이 달린다는 발상 자체가 내 머릿속에 없었다.
그런데 격변이 일어났다.
시작은 단순했다. 고맙고도 신기한 한 이웃이 계셨다. 그분의 유쾌함과 다정한 성품은 그분의 글에, 댓글에, 답글에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분께서 늘 나의 기록을 읽어주셔서 감사했고, 나도 그분의 글을 읽으며 달리기를 배우고 느끼며 더욱 열심히 달릴 힘을 얻었다. 내가 블로그를 접으려 했을 때 그분께서 나를 다시 찾아주신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다.
여하튼, 2023년 12월의 차가운 밤, 그분께서 올리신 글을 보았다. 블로그 이웃분들 중에 함께 남산을 달리실 분을 구한다는 글이었다.
글을 읽고 설레면서도 두려웠다. ‘이때가 아니면 내가 언제 남산을 달리겠는가?’란 생각에 설렜고 ‘내가 과연 뛸 수 있을까? 타인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란 생각에 두려웠다.
그 당시에는 달리기 관련 글을 읽다 ‘남산 업힐’ 후기를 심심찮게 발견할 때마다, 남산 달리기에 대한 도전 욕구는 호승심에 가까울 정도로 끓어올랐었다. 자택과 남산까지는 꽤 거리가 있는 터라 이런 기회를 빌미로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절대 달릴 일이 없을 곳이었다. 그러니 달리고 싶다면 지금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껏 혼자 달린 내가 처음으로 함께, 그것도 낯선 사람들과 함께 달린다는 결정을 내리기엔 결심이 필요했다.
다행스럽게도 설렘이 두려움을, 호승심이 망설임을 이겼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 얼마만큼의 페이스로 얼마나 달릴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남산을 달리고 싶었고, 왠지 그 이웃분의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모두 좋은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화 속 영웅에게는 언제나 시련이 주어져, 이를 극복해야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 당연히 본인은 그런 영웅이 아닌데 시련이 찾아왔다.
달리기 예정일이 속한 주 전후로 전국을 뒤덮은 엄청난 한파는 물론이고-이건 모두가 겪었을 일이지만-, 그 주 화요일에 수영 강습 후 귀가하다 넘어져 손바닥과 무릎을 찧었다. 넘어지면서 남산 달리기를 몹시 걱정했다. '다소 몸살기도 있었고 무릎도 멍들었는데 이런 상태로 참여해서 민폐를 끼치면 어떡하나'란 생각과 '아직 화요일이니 내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줄곧 고민하던 차,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남산을 함께 달릴 예정인 다른 분께서 올리신 ‘남산 북측순환로 눈 달리기’ 글이었다. 글을 읽고 주로의 상황 등 귀한 정보를 얻고, 용기 내어 참가 의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타인이 불편하지 않도록 연습해야 했다. 그래서 참가하기 전날, 다음날 입을 옷차림을 하고 가볍게 1km만 달렸다. 이틀 쉰 것치곤 평균 페이스도 괜찮고, 복장도 불편하지 않았고, 몸 상태도 좋아져 잘 달릴 수 있겠단 확신이 들었다.
대망의 당일! 영하 9도의 강추위를 뚫고 열 사람이 모였다. 모두 분명 처음 뵙는데도 달리기를 진심으로 즐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뛸 수 있어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
시작 전에 물품보관함에 짐을 맡겼는데, 나는 날씨가 추울 듯해서 입고 간 옷을 맡기지 않고 그대로 입었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난 정말 몰랐다. 상의 네 겹(바람막이, 두꺼운 플리스, 일반 플리스 긴팔, 기능성 긴팔)을 입고 오르막을 뛰는 일은 해선 안 됐다.
앞으로 닥칠 일을 까맣게 모른 채, 백범광장으로 올라가 몸 풀기를 진행했다. 서울 태생인데도 남산에 한 번도 오른 적 없었건만, 그 처음을 뛰어서 오르게 될 줄이야!
시작할 때는 가파른 오르막도 없고, 눈이 거의 다 녹아 달리기 편했다. 달리기에 진심인 분들과 함께, 평소 달리고 싶던 장소에서 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벅차오르는 감격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토요일 아침, 영하 10도가량의 몹시 추운 날씨인데도 남산을 달리는 다른 달림이들을 만나며 그들과 서로 응원을 주고받으며 달릴 수 있어서도 좋았다.
나는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이라 언제나 혼자 하는 활동을 선호하는데 이 달리기를 통해 함께 하는 활동의 즐거움을 깨달아 뜻깊었다. 미끄러질까, 넘어질까 염려하던 마음은 날아간 지 오래. 마냥 즐겁게 달렸다. 서로 대화도 주고받고, 발걸음도 맞추면서.
같이 달린 분들께서 유용한 정보와 뜻깊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셔서 듣는 재미 덕에 힘든 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는 말주변이 워낙 없어, 혹 나 때문에 지루하셨을지 모를 다른 분들께 죄송할 따름이었다.
이대로 마무리까지 순조롭겠거니 생각한 순간 문제가 생겼다. 달릴 때는 달리기 전, 중, 후의 옷차림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데, 전·후반 체온 저하만 생각하고 가장 중요한 중반을 간과한 결과다.
껴입은 상의 중 외투처럼 입은 두꺼운 플리스가 허벅지에 연신 부딪히면서 바람막이와 켕겼고, 하의도 서로 맞물리고, 달리면서 땀을 흘리니 옷이 점차 무거워져서 속도가 점차 처졌다. 설상가상으로 끝없이 이어진 오르막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모두 달리고 있기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저길 어떻게 달려?’라고 생각하던 곳을 내가 달리고 있다니 신기하고 대단한데, 굳이 직접 달렸어야 했을까? 왜 다른 사람들은 전혀 힘들지 않은 듯하지? 어째서 다들 이렇게 열심히, 안정적으로 달리시지? 내가 주력(走力)을 얼마나 더 길러야 다른 분들처럼 달릴 수 있을까? 나도 잘 달리고 싶다…….
오르막 후반부에는 즐거움보다 힘듦의 비중이 더 커져 결국 몇 차례 걸었다. 옷 문제가 없었다면 더 잘 달릴 수 있었겠다고, 다소 교만한 생각을 하면서. 복장 관련 교훈을 얻는 동시에 같이 달린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같이 달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분명히 포기했을 테니까.
인고 끝에 정상에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N서울타워(남산타워)를 보고 반가우면서도 힘이 나, 정상 부근에서는 다시 즐겁게 달렸다.
정상에 도착해 전망대를 보고 감격했다. 내가 남산을 뛰어서 오르다니! 함께 달린 분들께 남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건물들만큼이나 무수한 고마움을 느꼈다. 함께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같이 달릴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고 영광이었는데, 함께 기념사진까지 촬영할 수 있어 더욱 기쁘고 감사했다.
하산길은 내리막이라 훨씬 편했다. 경사가 다소 가팔랐지만 그만큼 속도가 붙어 더 즐겁고 신났다. 덜 힘들어서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기도 했다.
하산할 때는 반기마다 풀 마라톤에 참가하고 32km를 연습 삼아 달리는 몹시 대단한 분과 짝을 이뤄 달렸다. 덕분에 달리기 거리를 늘리는 방법, 달릴 때 지치지 않는 법, 고될 때 마음을 다잡는 법 등 아주 귀중하고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10km를 넘어,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고자 하는 열의를 싹트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실컷 내달리다 ‘삼순이 계단’을 다시 만나면서 남산 둘레길 한 바퀴 달리기가 마무리되었다.
영하 9도의 맹렬한 추위,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 만일 혼자였다면 삼분지 일도 가지 못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을까?
오롯이 함께였기에 끝까지 달릴 수 있었다.
이 당시 나는 이 모임의 주최자만 알고 있는 상태로 참가했었는데, 이미 서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나를 챙겨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모든 분들께서 서로가 서로를 어색하지 않게 살펴 주시고, 말씀을 걸어 주시고, 좋은 정보를 알려 주시고, 달릴 때 격려하고 응원해 주셨다. 감사했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사실, 함께 모인 모든 분들께 드리고 싶은 질문이 정말 많았다. 달릴 때 무엇에 집중하시는지, 가장 열심히 또는 즐겁게 달리셨던 적이 언제인지, 러닝 케이던스나 평균 페이스 향상을 위해 어떻게 하셨는지, 본인이 정체되었다고 느낄 때나 달리기 싫어질 땐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아침과 저녁 중 언제가 더 편하신지, 어떤 요일에 달릴 때 제일 행복하신지, 달리기 블로그를 하시게 된 계기도……. 이 모든 것을,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꼭 여쭈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런 질문을 하면 내가 그분들께 폐를 끼치거나, 너무 수다쟁이처럼 보일까 염려하기도 했었다.
다행히, 운 좋게도, 이 모든 질문을 할 기회가 다시 찾아왔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으리란 생각에 하루하루가 감사하다.
몹시 행복하고 즐거울 때, 필연처럼 생각한다.
‘나는 지금 타인의 삶을 잠시 빌려 살고 있구나.’
나에게 이때의 남산 번개 런은 황홀경과 고됨이 교차하는 가운데, 매일을 노닐듯 달리는 어떤 달림이의 시간과 기분을 감히, 감사히 빌려 달린 느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작고 기특한 용기가 내 달리기에 남기고 간 아주 커다란 흔적을.
그저 어느 연말, 어느 겨울의 뜻깊은 추억으로 남으리라고만 생각했던 그날은 내 인생을 지금까지도 뒤흔드는 폭풍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