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을 필연으로 바꿨던 가을

서브 4의 10km에서 첫 10km를 회고하며

by 수립

이 즈음에서 잠시, 맑은 가을에서 비 내리는 봄으로 잠시 되돌아가겠다.


병목현상 때문에 첫 1km를 5'45"로 시작하면서, 서브 4 페이스를 줄곧 외줄 타듯 오갔다. 가민상으로는 서브 4가 확실한데, 동아마라톤 코스가 300m가량 더 긴 점을 감안해 1분을 더하니 아슬아슬하게 서브 4 전후를 넘나들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단 1m라도 더 서브 4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히 가민에 미리 페이스프로와 내비게이션을 적용했기에, 랩 알림이 진동뿐 아니라 귀로도 들려서 매 km마다 다음 구간을 준비하기 몹시 수월했다.

이번 대회에서는 ChatGPT에게 엄청난 도움을 받았다. 문이과 통합형 인재의 표본, T와 F의 융합형 인공지능 친구는 특이점이 왔다는 사실을 잊을 만하면 주지시켰다. ChatGPT는 내게 ‘할 수 있다. 훈련 충분히 했다.’라고 자기 암시를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라고 조언했다. 그에 따를 때마다 자신감이 솟구쳤다. 정말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메웠다. 시작부터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작년 같은 대회 10km 부문에서 50분 이내로 완주했던 순간처럼.

4.2km 지점에서 우비를 벗었을 때 돌연 목이 말랐다. '목이 마르면 레이스는 이미 끝났다'라고 하던 마라닉tv 올레 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조금만 더 가면 급수대라 안심하는데, 빗줄기가 거세져 고글에 물이 맺혔다. 절묘한 타이밍에 감동을 받아 더 열심히 달렸다. 어차피 가야 해.

5km를 28분으로 통과했다. 페이스 차트에 제시된 28분 45초보다 45초 빨랐다.


달리면서 응원단과 자원봉사자들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주자들이야 달리면서 몸을 데울 테지만 응원단과 자원봉사자들은 차디찬 비를 맞으며 줄곧 제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본인들께선 달리지 않으니 이 궂은 날씨에 쉬고 싶으실 만도 한데 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계속 서 계시고, 자신의 가족처럼 응원해 주시고 최선을 다해 봉사해 주셨다.

나를 모르는데도 내 이름을 불러주며 응원해 주시는 분들께 보답하는 방법은 내가 더 열심히 달리는 일뿐이었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달리자 어느덧 10km를 지났다. 차트에 기록된 예상 시간인 56분 40초 이내로. 가민으론 55분대, 실제 기록은 56분 20초에 통과했다.

첫 10km 대회 기록이 어땠더라? 아, 더 중요한 게 있지. 내가 처음에 10km를 어떤 마음으로 넘었더라?




2023년 9월 17일, 나는 달리기 시작한 이래 가장 오랫동안 달렸다. 처음으로 10km를 달렸고 첫 10km를 1시간 이내로 완주했다. 막연히 바라던 소망을 가장 처음으로 실현하던 순간을 어떻게 잊겠는가.


제17회 선사마라톤 대회. 개최 100일 전부터 눈여겨보다가 94일 전에 접수했다. 대회 요강이 상세하면서도 명확해서 마음에 들었고 선사 유적지를 탐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한강변을 달리는 코스도, 완주 후에 순두부를 먹을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때 아침 5km 달리기를 제법 꾸준히 해내던 차라, 석 달간 계속 연습하면 10km도 달릴 수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10km 부문에 참가 신청을 했다.

막연을 필연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기에, 이 즈음 S업체에서 일일 자세 교정 강습을 받았다. 강습을 받으며 코치님께 내가 한 시간 안에 완주할 수 있을지 질문했고, 돌아온 답변은 ‘들어올 수는 있겠다’였다. 확언은 아니었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표현만으로도 감사했다. 언제든 이 말을 생각하면 멈추고 싶다가도 계속 달릴 수 있었다. 이후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했고, 대회 이 주일 전에는 대회 기념품과 배번호, 기록칩을 받고 비로소 실감이 나 더 열심히 달렸다.

그러다 대회 직전 주에 의도치 않게 훈련량을 줄였었다. 테이퍼링이라 포장했지만 게을러서 달리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래 놓고 쓸데없이 생각했다. 완주는 할 수 있을지, 전략이 수포로 돌아가진 않을지. 비합리적 신념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다 ‘어떻든 그날이 오면 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끊어내고, 준비물을 챙기고 선사마라톤 후기들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대회 요강과 첫 대회에 참가할 때 보았던 마라톤 준비 영상을 다시 꼼꼼하게 보고 잤다.


대회 시작 1시간 반 전, 집결지인 선사유적지에 도착하니 이름대로 움집을 형상화한 구조물이 있었다. 날이 궂어 우중주를 하게 될까 염려했는데 점차 맑아져 출발할 즈음에는 구름이 가득했어도 비가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는 달리기 좋은 날씨였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물품보관소에 물품을 맡기고 스포츠 테이핑을 받으러 갔다. 모 대학 물리치료학과에서 지원해 주셨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부위에 받고 있었다. 나는 양 무릎에 받았는데, 대단히 꼼꼼하게 잘해주셔서 달리기를 마치는 순간까지 무릎에 착 붙어있었다. 덕분에 힘차고 즐겁게 잘 달릴 수 있었다.

스포츠 테이핑을 해 주신 분께서 10km는 몇 번째 참가인지 물어보셔서 처음이라고 대답했더니 잘 달리실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으레 하신 말씀일 수도 있으나 이 말씀도 코치님의 말씀과 함께 새기면서 달렸다. 나는 할 수 있다, 잘 달릴 수 있다고 되뇌면서.

테이핑을 받고서 개인 스트레칭을 하고, 나름대로 조금씩 달리며 몸 상태를 가늠했다. S업체의 일일 강습 때 코치님께서 '선수들은 1시간 전에 대회장에 도착해서 스트레칭과 워밍업을 마치고 최상의 상태로 달릴 수 있도록 준비한다'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얼마 달리지 못했지만 워밍업을 시도했기에 의미를 둔다.

워밍업을 하고 물을 마셨다. 목이 마르기 전에 수분을 보충해야 원활하게 달릴 수 있다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오신 분께서 나에게 먼저 물을 따라주셔서 감사했다. 이후 집결지로 돌아가 다 같이 하는 스트레칭에 참여하고 출발지로 이동했다.


출발을 기다리며 NRC 목표 거리를 10km로 설정했다. 거리 아래 나타난 예상 시간에 들어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며 코스도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코스에 반환점이 두 개나 있어 굉장히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다. 덕분에 현장에서 도대체 어떻게 달릴까 궁금해서 참가하게 되었지만. 2500명이 참가했으니 사람들만 잘 따라가면 무사하겠다는 생각과 길 잃은 채 홀로 헤매는 나의 상상이 교차했다. 희한한 생각을 계속했다. 기록칩이 풀리거나 끊어지는 상상도 해서, 달리면서 신발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이상한 상상을 뒤로하고……. 출발!


10km를 한 시간 안에 완주하기 위해 두 가지 계획을 세웠다. 첫 번째는 초반 5km는 6분 이내로, 후반 5km는 5분 30초대 페이스로 달리는 계획이었다. 두 번째는 갈수록 힘이 빠질 테니 전체 평균 페이스를 5분 40초대로 유지하며 달리는 계획이었다. 어떤 계획이든 1km가 지났을 때 NRC 음성 피드백이 6분을 외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했다. 연습을 거듭하면서 초반에 예상보다 페이스가 많이 느려지면 만회하기 힘들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5분 59초라도 좋으니 반드시 첫 1km 페이스는 5분 이내를 기록하리라 마음먹었다.

시작부터 제법 경사진 내리막길을 달렸다. 신나서 내달리면서도 나중에 이 길이 오르막으로 변한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이후 교통통제에 따라 도로를 달렸는데 진행요원과 경찰들이 통제를 매우 잘해주셔서 모두 안전하게 달릴 수 있었다. 바로 옆에 트럭이 지나다니는데도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잘 달리는 모습에 안도하면서 페이스메이커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선지, 그분들이 잘 달리셨기 때문인지 몰라도 내가 지목하는 족족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하는 수 없이 계속 페이스메이커를 바꿔 가며 달리다 강변에 접어들었고, 1km가 지났을 때 원하던 피드백을 들었다.

“일 킬로미터, 오, 분, 오십, 구, 초.”

안도감과 동시에 웃음이 났다. 5분 59초라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될 줄이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직감했다. 아, 코스가 길구나. 실제 거리가 다소 차이 나는 대회가 있다고 들어, 만일 짧으면 완주 후 NRC에 10km가 채워질 때까지 달리기로 마음먹었는데 코스가 길다고는 예상치 못했다. 1분~1분 30초가량 더 달리고서야 1km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10km에도 풍선을 매단 페이스메이커가 계실 텐데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코스가 길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빨리 달려야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연스레 두 번째 계획을 택해 끝까지 가기로 했다.


2.5km 부근에서 1차 반환점을 돌자 첫 번째 급수대를 만날 수 있었다. 과감히 건너뛰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탁 트인 풍경이 몹시 아름다웠다. 하늘과 산과 강이 모두 푸르렀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 위로 햇살이 내리쬐는 터라 물에 비친 모든 것이 반짝였다. 대회 홈페이지에 '선사마라톤의 환상의 코스를 감상하라'고 적혀 있던 까닭을 아주 잘 알았다. 달리느라 풍경을 촬영하지 않은 점이 아쉬울 정도였다.

경치를 감상하며, 간혹 에어팟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립싱크로 따라 부르며 두 번째 급수대가 나올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달리면서 1km마다 알려주는 NRC 음성 피드백 이후 100m가량 지나야 거리 표지판이 나왔기에 코스가 길다고 확신했다. 아울러 5~5.5km에서 드디어 풍선을 매단 10km 1시간 페이스메이커를 만나 감격스러웠다. 그분을 앞지르면서 나중에 힘이 빠지더라도 최소한 동시에 들어올 수 있기를 소망했다.


정확한 지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달리다가 자전거 제한 속도를 규정하는 도로를 만났다. 제한 시속은 10km였고 전광판에 이 부근을 지나는 자전거의 속도를 표기하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자전거가 아니라 사람들이 지나가도 전광판의 속도가 바뀌었다. 당신의 현재 속도는? 10, 9, 13, 6, 7……. 다양한 숫자들이 흘러갔다. 시속 10km 이상으로 달리면 빨간 숫자가 떴다. 음, 인간 자전거인가? 웃으면서 나도 달렸다. 문득 내 속도가 얼마였을지 궁금해진다.


“아, 정말 재밌다!”

나도 모르게 외쳤다. 힘든지도 모르고 웃음이 났다. 정황상 러너스 하이는 아니었는데 즐겁고 신나서 견딜 수 없었다. 빠르게 2차 반환점을 돌고, 주로를 촬영하는 사진기를 보며 손가락으로 V를 그리고 계속 달렸다. 그러다 시간으로는 45~48분, 거리로는 대략 7.5~7.8km를 쉬지 않고 달렸을 때, 달리기 시작한 이래 가장 긴 거리를 한 번도 걷지 않고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격했다.

얄궂게도 감격하자마자 힘이 빠져 걷고 싶어졌다. 하지만 한번 멈추면 다시 달리기 몇 배는 힘들어지니, 머리를 비우고 달려내다 오르막을 맞닥뜨리고 전의를 상실했다. 살짝 걷다가 그동안 언덕길 연습을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달렸다. 역시, 몇 배는 힘들다. 그래도 달렸다. 이제 멈추면 영원히 멈추고 싶을 테니까. 다행히도 사람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응원을 들으며 힘을 낼 수 있었다.


열심히 달리다 어느덧 6분대 페이스로 달려도 1시간 내에 완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도를 올렸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끝내고 쉬자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에 신나게 내달렸던 내리막에 도달했다. 이제는 오르막이 된 길을 거의 모두가 걷고 있었다. 나도 걸었다. 여기선 도저히 달릴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끝에는 달려서 도로에 접어들었다.

토끼굴을, 식자재마트를, 학교를 지나 모든 주자들이 온 힘을 끌어낸다는 결승선을 보았다. 저절로 힘이 나서 미친 듯이 뛰었고……. 완주!


결승선을 뛰어넘자마자 NRC 앱을 종료했다. 코스가 실제로 약 200m 길었다고 인지한 순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록을 보았다. 두 번째 계획(전 구간 페이스를 평균 5분 40초대로 만드는 계획)은 상상 이상이었다. 나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잘 달렸다! 심지어 7km까지는 힘들지도 않았다.


완주 문자와 웹 기록증을 보니 실감이 났다. 정말 해냈구나. 내가 할 수 있구나.

가끔 NRC 기록을 의심했다. 내가 정말 이렇게 달리고 있는지, 혹 기기나 시스템의 오류는 아닐지. 그런데 대회에서 공식적인 기록을 얻으니 새삼스럽게 내 달리기가 정말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숫자들이 말해주는 듯했다. 지금까지 모든 기록은 오류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네가 정말 그렇게, 그만큼 달렸다고…….

누군가가 본다면 같잖다며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지만, 나는 스스로를 잘 믿지 못해서, 이 대회를 계기로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의심의 나’에게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얻어 못내 기뻤다.


선사마라톤 덕분에 10km로는 최초이자 최고 기록을 수립했다. 아울러 최장 거리 러닝과 최장 시간 러닝 기록을 경신할 수 있었다.

달리는 동안 힘들기도 했지만 꿈결을 노니는 듯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설레고 벅찼던 순간들이 더 많았었다.

달리면서 본, 반짝이는 한강은 지금까지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은하수처럼 흘러가고 있다.




과거를 빗물에 따라 흘려보낸다. 빗물이 시냇물을 따라 흘러간다. 흐르는 빗물처럼 나도 흘러가야지.

현재의 길 위로 발을 내딛는다. 어느덧 청계천 구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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