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이뤄낸 공식의 설렘

그저 퍼진 국수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by 수립

‘정신 차려! 넌 국수가 아니야! 넌 퍼진 국수 안 좋아하잖아? 퍼지면 안 돼! 여기서 퍼지면 정말 후회할 거야!’

달리는 내내 되뇌며 달렸다.


왠지 할 수 있을 듯해서

시작은 조심스럽게, 결심은 확실하게


마라톤에 참가하고 싶다는 마음은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순간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달리기는 나에게 갑자기 다가와 한바탕 나를 뒤흔들어 놓더니, 어느 순간 내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어느덧 하루 종일 마라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달리다 보면 마라톤에 나가고 싶어지리라 어렴풋이 생각했었지만 그 순간이 이토록 빨리 찾아올 줄 몰랐다.


기왕 참여한다면 행복하게 달리고 싶었다. 내가 도전할 거리를 충분히 달릴 수 있는 체력을 갖추어, 대회에서 실제로 달려내 스스로에게 입증하고 싶었다. 그래서 5km 종목을 선택했다. 그 이상 달릴 자신이 없다는 마음이 더 컸기에. 나는 대회 전까지 5km를 달릴 수 있으리라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매일 5km를 달리고 있어서 적잖게 당황했다. 이게……. 되네? 내가? 어떻게? 되니까 좋긴 좋은데, 생각보다 내가 잘 달리는데, 10km를 신청할걸 그랬나? 온갖 생각을 다 했었다. 달리고 나서 오래지 않아 겸허해졌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그럼, 비대면 마라톤 시작일까지는 여유가 있으니 대면 마라톤도 참가해 보면 어떨까? 생각하니 사람들에 섞여 ‘따로, 또 같이’ 달리는 즐거움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졌다. 동시에 ‘2023 동성제약 도봉마라톤 대회’가 생각났다. 나갈 대회를 물색하다 발견했는데 날짜도 비대면 대회 시작일보다 가까웠고 장소도 찾아가기 편했다.

스스로 아직 많이 부족하다 여겨 비대면 대회부터 신청했었는데, 상황도 체력도 내가 사람들과 함께 달릴 수 있다고 독려했다. 독려에 힘입어, 대회를 계기로 배우고 더욱 정진하자는 생각에 첫 대면 대회를 신청했다.


5km를 30분 안에 달리고 싶었다. 대회에서 km당 평균 페이스를 5분대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다행히 아침 달리기를 이어가며 이뤄낼 수 있었다. 다만 대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목표를 하루라도 더 이뤄내야 더 안전하겠다고 생각했다. 이 또한 성공하긴 했는데 그 직전 주에 5km를 달려낸 날이 이틀밖에 없어서 다소 염려되었다.

염려는 마음의 힘을 꺾는다. 마음의 힘이 꺾이면 몸의 힘도 꺾인다. 그러니 염려할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다. 더 달리고 더 공부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아침 달리기를 계속하고, 마라톤 후기와 팁을 검색하고, 달리기 관련 서적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대회에 나간다고 진정 실감한 때는 대회 며칠 전 택배로 배번표와 기념품을 받았을 때부터였다.

배번표를 받으니 설레고 신나는 한편 온갖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때 즈음 머릿속에서 다녀온 평행우주만 백 개가 넘을 듯하다. 백 개는 너무 과한가? 그래도 오십 개 이상은 될 듯한데…….


대회 전날에는 다음날을 위해 3km만 가볍게 달리고 대회 코스를 보며 마음속에 동선을 그리고, 마라톤 준비를 다룬 유튜브를 계속 살펴보며 하루를 보냈다.


나와 함께 달린 5km

나와 싸우는 이도, 나를 돕는 이도

모두 나 자신이었다.


대회 당일,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린다는 예보는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나타난단 말과도 같았다. 눈부시도록 화창한 날씨에 안도하며 대회장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스스로 정한 목표와 전략만을 되뇌었다.


목표: 30분 안에 완주하기. 개인 기록을 경신하면 더 좋겠지만 일차적 목표만 달성해도 좋다.

전략 1. 반환점까지는 힘을 비축했다가 반환점을 돌면서 온 힘을 내기.

전략 2. 나만의 페이스 메이커를 정하고 그분을 열심히 따라가기.


오버 페이스로 일을 그르치지 않고 끝까지 달릴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이기고 싶다는 마음을 되새기며 대회장에 도착했다.


치어리더 분들의 진행에 맞춰 스트레칭을 하고 나서 몸을 조금 더 풀어주었다. 짧은 경험을 토대로 나름 분석했는데, 나는 특히 대퇴사두근과 내전근을 풀어주어야 기록도 잘 나오고 편안하게 달릴 수 있어서 그 근육들을 중점적으로 스트레칭했다.

개회식 후에 나를 비롯한 참가자들은 각자 달릴 거리가 적힌 현수막에 맞춰 출발지로 이동했다. 마라톤 유튜브에서 선두로부터 1/3 지점에서 출발하면 가장 달리기 편하다는 팁을 봐서 따르려 했는데 걷다 보니 거의 선두에 서 있었다. 오히려 좋아! 이젠 전진뿐이야! 스트레칭하며 출발 순서를 기다렸다.


하프-10km-5km 순으로 출발했는데, 출발할 때마다 거리별 색상에 맞춰 폭죽이 터지자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환호성을 질렀다. 사회자가 5km 출발 전에 함성을 지르라고 했을 때는 더 크게 질렀고, 분홍색 폭죽이 펑 터지고-


출발!


동시에 5km로 설정해 둔 NRC 러닝 시작 버튼을 눌렀다. 전략을 기억하고, 초반에는 NRC 회복 러닝 가이드에서 배웠던 내용을 떠올리며 최대한 편안하게 달렸다. 힘을 숨겨뒀다가 반환점을 돌면서 발휘하자. 스스로의 진가는 그때부터 입증해도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며 달리다 첫 번째 페이스 메이커를 찾았다. 등에 '달토끼'라 적힌 티셔츠를 입고 계신 여성 분이셨는데 대단히 시원시원하게 달리셔서 정말 멋있었다. 옳다구나 하고 뒤를 열심히 따랐는데 어느 순간 그 분과 내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소중한 페이스 메이커를 잃을 수 없어 일부러 속도를 늦췄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분께서 계시지 않아, 다른 페이스 메이커를 찾아 달리고 있을 때였다.


“시간. 오, 분, 이십, 초. 일 킬로미터를 달성했습니다. 평균 속도입니다. 킬로미터 당, 오, 분, 이십, 초.”


NRC 가이드가 내 기준으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페이스를 말했다. 직전주에 잠깐 달성한 기록인데, 지금 난 편안하게 달리고 있는데 이렇게 빠르다고? 말도 안 돼! 별의별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일단 계속 달렸다. 멈출 수도 없고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정말 이 속도로 편안하게 달리고 있다는 생각에 마냥 기쁘고 행복했다. 내 기분이 좋아선진 몰라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행복해 보였다. 많이들 웃고 계셨다. 달리는 길에 열정과 긍정의 에너지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반환점까지 계속 달렸다. 나는 반환점 뒤로 돌아야 하는 줄 알고 돌아갔는데 내 등 뒤로 반환점 표지판 앞에서 돌면 된다고 하는 목소리를 듣고 살짝 아쉬웠다. 어쩐지 손짓하시더라. 잘 살폈어야 했는데……. 후회도 잠시, 도봉마라톤 대회는 감사하게도 2.5km에도 급수대가 있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잠깐 멈췄다. 물을 마시고 감사하다고 하며 컵을 돌려드렸다. 뒤에서 “5km 1등!”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기운 나게 해 주시려는 외침에 감사하며 다시 달렸다.


위기가 찾아왔다. 3km를 막 지났을 때 오른발에 쥐가 났다. 땅에서 솟아난 손이 내 신을 뚫고 들어와 오른쪽 엄지~중지를 움켜쥐고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오른쪽 윗배도 아프기 시작했다. 복부 통증과 관련된 의학 칼럼을 떠올렸다.


Q. 달릴 때 우측 상복부가 아픕니다. 왜 아플까요?

A. 횡격막이 압박을 받아 수축하면 아플 수 있습니다.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왜 장기들이 지금 굳이 존재감을 드러내지? 10km를 신청하지 않았던 후회감은 순식간에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올해 들어 가장 빠르게 겸손해진 순간이었다. 솔직히 그때부터 걷고 싶었지만 맞은편의 주자들이 응원해 주셔서, 나도 그분들께 응원을 보내고 계속 달렸다.


그때부터 국수 타령을 시작했다.

‘넌 국수가 아니야! 퍼지면 안 돼! 여기서 퍼지면 정말 후회할 거야!‘

달리는 내내 되뇌며 달렸다. 넌 퍼진 국수 안 좋아하잖아? 달리기도 마찬가지야. 여기서 퍼지면 정말 후회할 거야. 그토록 기다린 순간이잖아…….

좋아, 다른 데 몰두하자. 두리번거리며 새로운 페이스 메이커를 찾았다. 회색 티셔츠를 입고 러닝 벨트를 찬 여성 분이셨다. 그분을 따라가며 국수 타령을 100절 가까이 한 듯하다.


결승점까지 3/4가량 남은 지점이라 기억한다. 달리다 쥐가 더 심해졌다. 열 보만 걷자. 생각하고 스무 보 가량 걷다가 다시 뛰었다. 돌연 “파이팅!” 소리가 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달리다 만난 첫 번째 다리에서 앉아서 주자들을 응원하던 분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달릴 힘이 솟아났고, 주기적으로 읽는 달리기 팁에서 배웠던 내용이 떠올랐다.

학습내용을 실전에서 활용하며 내 안에 더 달릴 수 있는 체력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명료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체력 반, 정신력 반으로 달리다 에어팟에서 흘러나오는 Queen의 〈Don't Stop Me Now〉를 듣고 속도를 냈다. Don't Stop Me, Don't Stop Me……. 저도 멈추지 않고 갑니다! ……는 STOP. ME. NOW. 걷기로 빠르게 전환했다. 발에 난 쥐 때문에 더 달리기 힘들었다.


몇십 미터가량 걸었을까? 어렴풋이 결승점이 보였다. 물품 보관소 위에 뜬 애드벌룬도 보였다. 안도감에 휩싸여 날듯이 달렸다. 이때 아마 1km가량 남았던 걸로 기억한다. 동시에 다른 페이스 메이커를 찾았다. 등에 본인의 성함과 17을 새긴, 흰 티셔츠를 입고 계신 여성 분이셨다.

순간 저분을 놓치면 나는 영원히 퍼진 채, 움직이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매우 강하게 들었다. 새로운 페이스 메이커를 따르겠다는 일념 하나로 집중해서 달렸다. 달리다 보니 결승점 전광판에 나타난 ‘27:02’ 숫자가 보였다.


내 종전 최고 기록은 27:48이니까, 제발 46초 안에만 들어가게 해 줘! 미친 듯이 달렸다. 내 앞의 페이스 메이커가 결승점에 들어갔다. 뒤이어 나였다. 주자들의 사진을 찍어주시는 분이 나를 찍어주셨다. 드디어 끝났다……!

걸으면서 눈을 깜빡이는데 MC 님의 말씀이 들렸다.


“5km 달림이 분들이 들어오고 계십니다.
27분 15초, 5615!
5km 여자 3위가 들어왔습니다.
5km 여자 3위, 5615.“


5615, 와, 좋겠다. 그런데 숫자가 뭔가 익숙하다.

왜? 잠깐……. 난가? 난데? 나잖아?!

주위를 둘러보다 어떤 분과 눈이 마주쳤다. 그분께서 웃으면서 내게 세 손가락을 들어 보이셨다. 나는 나를 가리키며 “저요?”라고 되물었다. 그분께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얼떨떨해하며 감사를 표했다.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내가 운이 좋았다고, 더 잘 달리는 분들께서 10km나 하프에 나가셔서 그렇다고. 나는 나를 믿지 않았다. 30분 안에만 들어오길 간절히 바랐다. 30분 안에 들어오면 좋고, 내 기록을 깨면 더 좋다고만 여겼다. 첫 마라톤이니까. 다른 대회였다면 내 순위가 이렇게 높진 않았을 터.

그래도 정말 기뻤다. 지금도 떠올리면 몹시 황홀해진다. 사실 순위보다 기록을 경신했다는 사실이 가장 감격스럽고 행복했다. 5km를 처음으로 27분대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 대회로 NRC의 마일 최고 기록과 5K 최고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본 대회에서 5km는 별도 기록 집계와 시상을 하지 않았지만, 대회 당일 방송으로 확인하였습니다.


대회 기록은 완주 당시에 MC 님께서 불러주셨던 27:15로 NRC상 기록과 다소 차이났다.


완주 메달과 기념품을 받고 나서 룰렛 이벤트에 참여했다. 선물을 대회 참가자들 모두가 받고도 남을 정도로 넉넉하게 준비했다는 안내대로 풍성하고 다양한 물품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건강기능식품, 푸딩 염색약, 화장품, 양말 등. 나는 샴푸와 트리트먼트 세트를 받았다.


잠시 쉬다가 다른 사람들이 완주하는 모습을 구경하러 결승점 근처로 내려갔다. 다른 사람들이 결승점에 들어오는 모습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하프 우승자들이 들어올 때 결승 테이프를 끊고 들어오실 수 있도록 해서 더욱 멋있었다. 남성분과 여성분 모두 싱글렛과 반바지를 입고 계셨고, 숨길 수 없는 고수의 기운이 느껴졌다. 정말 멋있고 아름다우셨다. 절로 존경심을 느꼈다. 나도 언젠가 하프를 달릴 수 있도록 열심히 연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러려면 10km부터 달릴 수 있어야겠지만. 이후에 시상식을 구경하고(어떻게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을까? 감탄을 금치 못했다.) 럭키 드로우 결과를 보다가 집에 돌아왔다.


가족들이 다음에는 10km에 참가해 보라고 했다. 웃으면서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었다. 다른 대회에 또 나가고 싶고, 내년에 도봉마라톤 대회가 열리면 또 나가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달리면서 보았던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연하다. 그만큼 첫 대회는 내게 강렬하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과연 이듬해에도 대회가 열릴까? 내가 또 5km를 달릴 수 있을까? 생각하며 달리면서 여름을 보냈다.

그 이듬해, 하프 부문에서 상을 탈 줄은 당연히 까맣게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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