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선에 서면 나는 설렌다

계획은 흔들렸지만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by 수립

바라 마지않던 순간,

나의 4가 다시 돛단배가 되던 날,

단 한순간도 걷지 않았던

나의 최고의 대회를 회고하며.


시작은 머피의 법칙으로:

어떤 사진에도 남지 못할 뻔하다가


대회 전날, 오래전부터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풀이한 대로 짐을 꾸렸다. 작년 JTBC마라톤을 비롯해 그간 함께 달렸던 장비들을 하나씩 꺼냈다. 특히 첫 풀 마라톤에서의 트라우마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예비 시곗줄도 잊지 않고 챙겼다.

장비를 갖추고 마찬가지로 장기 기억이 되어버린 계획을 표에 옮겼다. 나는 대회 당일에는 항상 새벽 4시에 기상해서 꾸물거리다 4시 20분부터 준비를 시작해 5시 전후에는 집을 나선다. 하지만 이번엔 빠릿빠릿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대한민국의 3대 주요 마라톤인 동아마라톤은 그 위상에 걸맞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에 더더욱 일찍 출발해야 했으므로. 내가 속한 모든 크루에서 사진을 촬영하려면 시간이 촉박하기도 했기에, 그 점까지 고려해서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계획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어쩌면 다르기에 이상과 현실이라고 각각 이름 붙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당일 기상부터 대회장에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을 잘 맞췄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 들르고 발목 테이핑을 하는 등 정비하느라 첫 사진 촬영을 놓쳤다. 짐을 맡기고 두 번째로 계획된 집합 장소로 향했는데, 내가 워낙 길치인 터라 도착했을 땐 이미 늦었다. 그때까지 남은 몇몇 분만 겨우 뵈었다.

이때 한 크루원께서 나를 살펴주셨다. 이분이 아니셨다면 나는 복통으로 DNF 했을지도 모른다.

DNF: Did Not Finish=중도 포기


그분께선 내가 사진에 찍힐 모습을 고려하여 내게 싱글렛을 넣어 입기를 권하셨는데, 나는 크루의 로고를 가리고 달리기 죄송스러워 망설였다. 배가 차가우면 어김없이 배앓이를 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싱글렛 뒤에 더 큰 로고가 있으니 괜찮다며 나를 안심시켜 주셨고 손수 배번까지 다시 달아주셨다. 덕분에 나는 아프거나 크게 힘들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게 달릴 수 있었다.

달리면서 생각했는데, 내가 응원단까지 무사히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분의 말을 따랐어야 했다. 응원단들은 나를 비롯한 크루원들의 무사 완주를 위해 그 자리에 계시므로.

돌이켜 생각하고, 내가 그분의 말을 따랐던 이유 또 하나를 깨닫는다. 단지 복통을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를 살펴주신, 진심 어린 배려와 격려를 오롯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길 찾기 능력 덕분에 나는 마지막 단체사진마저 놓쳐버렸다. 망연자실하던 찰나, 남아있던 일부 크루원께서 나를 발견하고 함께 사진을 촬영해 주셨다.

어떤 사진에도 남지 못할 뻔했던 내 준비는 그제야 빛을 발했다.


미래의 내게 1분을 맡기고:

나를 설레게 하는 출발선 앞에 서다


“목표에서 2분은 없다고 생각하라.”


출발을 기다리며 크루의 고문께서 하신 말씀을 되뇌었다. 하지만 내겐 2분까지 여유를 확보할 자신이 없었다. 한편으론 설령 부러지고 바스러질지라도 오늘만큼은 오랫동안 간절히 꿈꾼 sub 4에 단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딛고 싶었다.

sub 4: 마라톤 풀 코스(42.195km)를 4시간 안에 완주하는 일(3:59:59까지를 인정한다.)


그래서 3시간 58분 59초로 들어올 수 있는 페이스 차트를 외웠다. 5km 28분 45초, 10km 56분 40초, 15km 1시간 24분- 이후에는 하프 지점(21.1km)에 다다랐을 때 2시간 이내여야 하고, 30km에서는 무조건 2시간 50분 이내를 기록해야 한다는 사실을 줄곧 상기했다.

이어서 주문을 외듯 숫자를 읊조렸다. 27.5, 28, 30, 35, 41.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계신 지점이었다.

그리고 완주 후에 크루원들과 함께 감자탕을 먹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국물을 먹으며 함께 웃고, 완주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즐거운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내가 완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하며 앞을 보았다. 저만치 앞에 4시간 페이스메이커를 알리는 풍선이 있었다.

나를 설레게 하는 출발선 앞에.


대회 한 달 전, 이번 달리기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길이 없어 돌연 막막했다. 막막함이 어느덧 먹먹함이 되어 나를 짓누르던 때, 나를 일깨워 준 고마운 분의 고마운 말씀이 있었다.


“대회는 저를 설레게 합니다.
저를 설레게 하는 대회를
더 잘 치르고 싶어 달립니다.
출발선에 서면 설레니까요.”


나는 동아마라톤 출발선에 서서 그 말씀을 줄곧 속으로 되뇌며 지금까지 내가 출전했던 모든 대회를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나도 그분처럼 출발선에 서면 설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작 전에 무슨 일을 겪었더라도 출발선에 서면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리고, 내가 살아있다고 느낀다.


이번에도 역시, 출발을 알리는 소리에 설레는 마음으로 발을 내딛는다.


모두가 각자의 시간을 시작한다.

나도 지금부터 나만의 시간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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