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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잔 Sep 25. 2024

납량

지운과 해린은 여덟 살 차이가 나는 가까운 친척이다.


만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지운과 해린이 선택한 장소는 '오풍'이었다. '오풍'은 오래된 양옥과 한옥이 늘어서 있다. 양옥과 한옥의 그림자는 그물을 폈다 오므렸다 하며 사람을 낚았다. 처음에는 알려지지 않다가 하나둘씩 오고 가보고는 입소문에 명소가 되었다.

아, 좋다. 아, 이것 좀 봐. 아, 저기 좀 봐. 이런 추임새가 곳곳에서 들렸다. 무표정하게 듣고만 있던 오풍은 무심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알고 보면 사연이 있는 곳이다. 1947년, 방화 사건으로 큰 불이 동네 뒷산과 인가를 태웠다. 그 위에 살아가던 모든 생명이 사라졌다. 땅 위에 시체가 쌓이면 저주가 머문다고 생각했던 아쉬운 시절이었다. 버려진 땅이 되었다. 시간은 자라 그런 생각들을 꾸짖으며 어른 노릇을 했다. 세월이 흘러 주민들의 손에 몇 만 그루의 나무가 심기고, 양옥과 한옥들이 들어서고 점차 지금의 아, 저기 좀 봐 봐! 하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때 인기가 식어 잊혔지만 요즘 들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정처 없이 걷는 것이 취미인 지운의 취향대로 오풍 안쪽 거리를 지나 왕복 4차선 대로변으로 나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로지 나무들의 잘빠진 외곽선을 보는 것으로 아, 저 나무 봐. 이런 추임새를 주고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계속되는 직진이었다. 더는 직진할 수 없어진 갈래길 앞에서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운 멀리에 확실치 않은 초록색 아지랑이가 눈에 띄었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가까이 가보니 녹음이 선 공원이었다. 입구가 워낙 안쪽에 있어서였을까 인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스산한 기분을 주는 색이 바랜 회양목 위에 거미들이 집을 지었다. 관리는 잘 되지 않았어도 아기자기한 공원이었다. 지운과 해린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공원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골짜기를 지나고

곶자왈의 덩굴처럼

늘어진

두툼한 나무들의 뿌리가

걸음을 막는

우림의 커튼을 걷어내니

시냇물이 흐르고

좁은 계단이

있고

작은 돌멩이들로 꾸며진

공원 안에 공원과

만났다


공원 안 공원에는 지운과 해린에게 앉으라는 듯 둥그런 나무 벤치가 중앙에 놓여있었다.

언니, 그럼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돼?

잔소리하는 새끼들 무시하고 하던 대로 하면 돼.

지운과 해린은 자리에 앉자마자 지운을 따라 소설가가 되기 위해 회사까지 그만둔 해린의 불안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몇 년 동안 이렇다 할 소득 없이 제자리걸음인 지운을 보며 해린은 생각이 많아졌다. 언니의 설득에도 미래를 향한 의심은 해린을 괴롭게 했다. 해린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데 계단 쪽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쑥 작은 계단에 나타난 한 남자가 지운과 해린을 향해 다가와 인사했다. 지운과 해린은 길을 따라 지나갈 줄 알았던 남자가 말을 걸어와 당황했다. 

네에... 안녕하세요. 별 수없이 해린이 인사를 받았다. 

땀을 좀 식히고 싶은데 잠깐 앉아도 될까요? 

아... 네, 앉으세요. 지운도 별 수없이 대답했다. 

제가 방해한 것 같아요. 재미있는 대화중이신 것 같았는데. 남자가 말했다.


지운과 해린과 남자는 어색한 인사치레 이후로, 신상에 대해 풀어놓은 이후로, 농담을 주고받은 이후로, 서로의 고민까지 털어놓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남자도 소설가로 등단하려다 몇 년 동안 아무런 성과가 없어 전과하여 중학교 국어교사로 일했지만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아 다시 소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입술이 눈에 띄게 얇은 남자가 자기 이야기를 할 때 허-와 커-가 섞인 한숨 소리를 냈는데 그때마다 얇은 입술이 휜 활처럼 구부러지는 모양이 묘하게 지운과 해린을 사로잡았다.

휜 활은 멈추지 않고 활시위를 당겼다. 

교사로 일하며 한 남자아이와 지독하게 얽힌 악연에 대한 사연을 들었을 때 해린은 낙하하는 지운의 아래턱을 급히 손으로 막아야 했다. 남자를 향한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의 일방적인 집착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한 시간 동안 이어진 힘 없이 낮은 독백과 눈에 고인 눈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일로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떠나고 남자를 덮어주던 작은 껍데기들이 모조리 깨졌다. 남자에게 봄과 겨울, 여름과 가을은 색이 바랜 잿빛 무덤같이 서로 다를 것이 없었다. 지운과 해린, 작은 숲 안이 순식간에 비극에 동화되었다. 삶이 이렇게 꼬여서야 누가 살려고 할까. 지운과 해린이 눈빛으로 생각을 주고받았다. 남자의 사연이 마지막 대사를 내뱉고 끝이 났다.

"내가 살아보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더라고, 모든 게."

주변이 어느새 검게 변했다. 자정이었다. 지운과 해린이 어머, 어떻게 해. 뭐야, 언제 이렇게 된 거야. 호들갑을 떠는 사이 남자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지운과 해린이 당황하여 고개를 완전히 돌려 주변을 훑어봐도 남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운과 해린은 공포심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어느 한 구석에서 소설가의 기질이 피어올라 이 상황을 소설의 소재로 이용해 볼까 하는 음흉한 생각을 했다. 낮과 밤의 경계가 거의 사라지고 긴장감에 휩싸여 서둘러 공원 안을 빠져나왔다.


그날 이후, 지운은 지운대로 해린은 해린대로 남자와 공원을 소재로 글을 써보려고 자료를 조사하던 중이었다. 지운이 책상 앞에 앉아 이것저것 검색하다 눈에 띄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1974년 4월 1일 오풍동 인근 공원에서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냇물이 흐르는 공원 안쪽 둥그런 벤치에 반듯하게 누워있던 남자는 신체에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고 심정지 상태로 발견되었다. 입가와 위장에서 냇물 성분이 발견되었다. 남자의 오른쪽 어깨 옆에 물병이 있었는데, 냇물로 채워진 병 안에 산수유 열매, 매화, 진달래, 벚꽃, 개나리 꽃 잎이 들어 가 섞여 있었다.⌟

기사에 실린 남자의 흑백 사진을 보고, 순식간에 입술이 바짝 말려 들어갔다.

미 b미 b미 b도- 레 레 레 시-

지운이 전화벨 소리에 어깨가 들썩일 만큼 놀랐다. 해린의 전화였다. 해린도 지운과 같은 기사를 찾아 읽었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어떻게 해?

나도 모르겠어. 지금 만날까? 다시 그 공원에 가볼까?


낮은 금세 지나고, 밤이 되어 갔다. 지운과 해린은 기억을 더듬어 남자와 만났던 작은 공원을 찾아 어두움 속으로 사라졌다가 가로등 아래 둥그런 벤치 앞에 나타났다. 그날처럼 지운과 해린이 벤치에 앉자 곧, 좁은 계단을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손에 물통을 든 남자가 지운과 해린 곁으로 다가왔다. 

잘 지냈나요? 남자가 인사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몇 초가 지나갔다. 지운이 대답했다. 

네, 잘 지내셨어요? 남자가 미소를 짓고 물통의 뚜껑을 열어 물을 마셨다. 권하듯 지운과 해린의 몸 쪽으로 물통을 건넸다. 해린의 긴장은 극한에 달해 지운을 쳐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이어진 남자의 말이 극지의 공포감을 몰고 왔는데, 소설 쓰는 일이 너무 힘들다며 함께 써보자는 제안이었다. 숲 안을 돌아다니다 더 깊고, 더 의미 있는 장소를 알게 되었다며 자신과 함께 가자고 거듭 졸라댔다.

언니, 어떻게 해. 언니...

해린이 부르는 소리에도 지운은 대답이 없었다. 지운의 눈동자는 초점 없이 굴러다녔다. 잠에 취한 지운을 흔들자 깨어나지 못하고 쓰러졌다. 언니!!!


해린아! 지운이 해린을 깨웠다. 지운의 침대에서 깨어난 해린의 이마에 내려앉은 식은땀을 지운이 쓸어 닦았다. 

언니, 나 꿈꿨어. 

꿈 아니야 해린아. 지운의 미간이 꼬깃꼬깃 접혀있었다.

언니, 우리 이제 어떡해?

나도 모르겠어. 다시 공원에 가볼까?


며칠 후 오전에 들른 공원의 입구에는 빛바랜 간판이 보였다. <오풍 공원>이라고 쓰인 간판을 지나 둥그런 벤치까지 가는 길이 기억과는 다르게 짧게 느껴졌다. 둥그런 벤치에 앉았다. 한참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해린이 걱정하던 말을 꺼냈다.

언니, 나 무서워. 회사 그만둔 게 잘한 일인지 모르겠어. 글 써서 먹고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정말 좋아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어.

해린아, 목마르다. 우리 물 마실까? 지운과 해린이 작은 시냇가에 냇물을 두 손에 담아 마셨다. 입안으로 열매와 꽃 잎 향이 퍼졌다. 둥그런 벤치로 돌아온 해린은 낮잠에 빠졌다. 지운이 작은 수첩을 꺼내 사연을 적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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