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인 만남
서린의 동생 소민은 지적발달장애가 있다. 겉보기에 알 수 없었다. 미세하게 표정이나 말투에서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서린이 소민과 싸울 수 없는, 어릴 때부터 쌓아 올린 사적인 처세가 있고 사연이 있다.
서린의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다. 목소리가 이상한 것도 모자라 소리를 지르며 급발진한다. 3학년 때
순둥 하게 귀여웠던, '판다'같고 곰돌이 '푸'같던 아들이 사라졌다.
4학년의 아들은 괴물이 되어간다.
서린은 잠시동안, 3초 정도? '내가 찢어지게 배 아파 낳아서 왜 이 고생을 할까. 괜히 낳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먹고 신생아와 유아기 시절 방글대며 큰 기쁨을 안겨 주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내가 미쳤지. 그런 생각을 하다니.' 마음을 추스르고 아들~하며 부드럽게 불러보아도 눈만 마주치면 파이트, 파이팅 하는 일이었다.
이노무새키.
남의 집 아들과도 다르고 내 집 큰 아들과도 다르게 옷 타령이 잦고 입이 짧아서 주면 주는 대로 먹지 않는다. 지속 가능한 대화가 불가능하다.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 놓는다.
동생 소민은 일찌감치 유치원에 간 언니 서린보다 1년이 늦은 여섯 살에 유치원에 입학했다. 소민은 엄마뿐이었거나 모르는 사람을 믿지 않거나 너무 잘 믿었다. 엄마는 소민이 자신의 내성적인 성격을 닮아 그러나 보다 했다. 사람 좋아하는 남편을 닮아서거니 했다. 유치원에 입학하고 일주일이 지나, 적응기간이 지나,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그랬다. 전문병원에 가보았다. 소민엄마가 듣기에 애매한 소리였다. 경도 지적 장애로 일상생활, 사회생활이 가능하다. 나이가 어려, 지켜보면서 이런저런 학습을 시도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했다. 소민엄마는 소민이 자기 없이 독립이 가능한지 강렬히 궁금했다. 소민엄마의 걱정은 모든 부모의 걱정이기도 했다. 다른 점은 무엇인가.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묻고 싶었으나 묻지 못했다. 의사 선생께서 신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린과 소민이 주변에서 흔히 보는 자매처럼 자랐다. 서로 옷도 뺐고 먹는 것도 뺐고 질투하고, 때리기도 했다. 서린과 소민의 대화, 말싸움. 제일 재미있는 싸움 구경. 서린은 말싸움에서 소민을 이기지 못했다. 서린이 당장 친구와 약속이 있어 급하게 나가야 하는데 소민이 약속의 의미는 알아도 의무에 관해서 그 무게를, 결과를, 책임을 연결하지 못했다. 서린의 입장에서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 같은 경계가 엄연히 있음을 경험했다. 받아들였다. 앞으로도 서린이 지는 싸움이라는 것을.
성인이 된 서린과 소민. 소민은 언니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는 것을 익혔다. 소민은 눈치가 늘었고 서린은 양보는 자신의 운명 같은 것으로, 그 운명을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서린이 결혼 후 아들 둘을 낳았다.
엄마가 되어 본 서린은 세월을 지낼수록 자기 엄마를 알게 됐다. 서린의 아들 둘 중에 더 까칠해 보이는 둘째 아들이 서린에게 훈육을 당하는 일이 잦아졌다. 소민은 언니의 둘째 아들이 혼날 때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언니를 못마땅하게 보거나 쏘아붙였다.
둘째 아들이 저녁 먹는 자리에서 잘 나가다 밉살 맞은 소리로 서린을 괴롭힌다. 한바탕 큰 소리가 났다.
너는 버르장머리가 없어.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다고. 눈치 없는 녀석.
서린의 훈육은 어느 때는 장소도 가리지 않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계속됐다.
너는 혼내는 게 맛있나 봐?
서린이 자기 아들을 혼내는 모습을 보고 소민이 하는 말이다.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 몇 초였지만 그 말은 몇 분, 몇 시간이 지나가도 서린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그 말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생각 속에 갇히고 영원한 고통의 더하기만 있는 처지로 만들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운명을 더듬었다.
둘째 아들에게 그랬듯 왜 내 동생으로 태어나서 밖에도 못 나가고, 친구도 못 만나고, 엄마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네. 어린 서린이 그랬었다. 그때는 몇 번이고 그런 생각 떠올라 후회하고, 잘해주고, 뉘우치고 그랬다. 이번엔 얼른 뉘우쳐지지가 않네.
소민. 어렸을 적,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며 자신에게 싸움 대신 훈육을 감행했던 언니가 미웠다. 둘 사이 네 살 터울이었다. 15 빼기 11은 4. 나도 뺄셈 덧셈 할 줄 알아. 지가 뭔데 나를 혼내.
나도 언니로 태어났다면. 내가 먼저였다면.
자기 집으로 돌아온 서린이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동현이가 요새 너무 말을 안 들어. 엄마는 어떻게 참았대. 일도 하면서. 아, 대단해.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서린이 멍한 눈으로 정적을 듣고 있었다. 엄마의 대답이었다. 엄마는 살아있을 때도 그런 정적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는 했다. 소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뭘 혼내는 게 맛있어. 언니한테 할 소리냐.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이기지배 지가 듣기 싫은 말에는 대답 안 하지. 다 알면서.
아무 말이 없다가 소민이 대답했다.
끊어.
끊지 않고 기다리는 서린이다. 서로 말없이 대치하다 언니 서린이 먼저 끊는다. 동생 소민은 전화를 먼저 끊는 일이 없다. 서린은 알고 있다.
서린과 소민이 기억을 더듬고 운명을 더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