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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잔 Nov 11. 2023

거절하는 것을 거절하고

계시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현정이 수요 저녁 예배에 다녀오는 길, 4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한 여자가 지하철을 타기 전 화장실에 들른 현정을 붙잡아 세우더니 현정에게 꼭 필요할 것 같다며 입고 있던 외투의 단추를 풀어 벗으려 했다. 현정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자신에게 필요할 것 같다는 말도, 단추를 풀고 있는 모습도('이 여자 뭐 하는 거지?') 어이가 없어 재차 거절했지만 꼭 주고 싶다는 고집 센 여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내키지 않았지만 외투를 받아 들고 말았다. 11월 초겨울 날씨에 반팔 티셔츠 차림이 되어버린 여자의 뒷모습을 잠시 멍한 상태로 바라보다 정신을 추스르고 손에 쥔 검정 외투를 바라보았다. 이제 갓 권사로 취임한 70세 현정에게 첫 번째 시험은 이런 식이었다.


세탁을 마친 외투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허리가 짧은 검정 캐시미어 코트. 주머니 속에는 작은 빨대를 감싸고 있던 비닐 한 개뿐이었다. 이름 없는 코트였지만 보풀 하나 없는 결이 가지런한 새 옷이었다. 현정은 자기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을 허리가 짧은 코트와 여자를 반복해서 생각했다. 

내키지 않은 기분으로 며칠이 지나갔다. 


"엄마, 이게 뭐야?" 마실 온 현정의 딸이 메고 있던 시장가방을 내려놓고 거실에 빨래와 함께 걸려 있는 새 코트를 향해 물었다. 엄마의 취향을 잘 아는 딸이었기에 눈에 띄는 코트를 보고 호기심 어린 뉘앙스를 실어 물었다. 현정이 입가에 고인 침을 문질러가며 지난 수요일에 있었던 지하철 화장실 사건을 딸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현정의 이야기가 끝나자 딸이 놀랍다는 눈으로 입에 손을 갖다 대고는 ''엄마, 너무 신기하다." 라며 현정도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딸과 엄마 사이에는 누구 한 사람이 놀랍다면 놀랍지 않은 일도 놀라운 일이 되기 마련이다. 

현정의 딸이 옷에 관심이 많고 눈썰미도 있어 동네를 오가면서 작은 옷가게들의 옷을 눈여겨보고 어떤 가게는 주인과 친분도 쌓여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2년 전쯤 동네에 오래 비어있던 자리에 작은 옷가게가 들어섰다. 이름도 그렇고 쇼윈도에 걸려 있는 옷도 그렇고 호기심에 한 번 면바지를 산 후로 취향이 맞지 않아 가지 않았던 곳이다. 

구찐과 샤놀의 집. 여자의 인상착의와(작은 키에 깡마른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짧은 검은색 단발머리를 한) 오래도록 팔리지 않아 한참을 쇼윈도에 걸려 있던 검정 캐시미어 코트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딸은 확신을 가지고 현정에게 알려주었다. 


구찐과 샤놀의 집. 유진이 개업을 한 지 2년 6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30만 원을 주고 작명가에게 받은 이름을 간판에 걸었다. 동대문에서 15년을 일하고 이제야 자기 사업을 하게 된 유진은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며 가게를 오픈했다. 직원으로 일을 할 때 몰랐던 크고 작은, 특히 작은 일 하나까지 스스로 처리해야 했으므로 피곤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장사 노하우는 꽤나 쌓여 그럭저럭 열심히 하면 하는 만큼은 벌이가 되었지만 놀면 노는 만큼 벌이가 줄었다. 시간만큼은 자유롭게 쓰려니 했는데 유진이 원하는 그림과는 전혀 달랐다. 갈수록 동네 사람들의 취향과도 멀어져 갔다. 그동안 적지 않은 월급으로 샤넬이며 구찌며 눈에 들어오는 옷과 가방을 고민 없이 사던 터라 갑자기 벌이가 줄었다고 씀씀이도 확 줄어들진 않았다. 처음 시작했던 상상과는 다르게 모든 일이 흘러갔다.


부동산에 가게를 내놓았다. '구찐과 샤놀의 집'이 2년 6개월 만에 문을 닫게 되었다. 부동산에 가게를 내놓은 날 유진의 마음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이 되어 방황했다. 유진은 검정 백팩에 팔리지 않는 옷을 차곡차곡 접어 넣었다. 누빔 잠바, 회색 가죽 재킷, 무늬가 있는 청바지, 소매가 롤업된 맨투맨, 품이 넉넉한 스웨터 원피스를 가득 넣었다. 마지막으로, 오래도록 팔리지 않는 쇼윈도에 걸린 검정 캐시미어 코트를 걸쳐 입고 '구찐과 샤놀의 집'을 나섰다. 가게와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하천을 향해 걸었다. 하천 입구에 들어선 유진의 눈에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긴 하천이 고였다. 유진은 걸었다. 2시간을 걸어 한강에 도착해 숨을 돌렸다. 한강 다리 건너로 반짝이는 불빛을 보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을 담아 불빛에 쏟아부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녁을 먹지 못한 유진은 바나나 우유로 허기를 채웠다. 저녁 8시였다. 1시간 정도를 걷고 지하철 화장실에 들렀다. 화장실 밖으로 나가려던 유진의 눈에 70세가량 돼 보이는 여자의 손에 성경책이 들려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눈과 다부진 입술을 가진 여자의 생김새가 유진을 안심시키면서 동시에 알 수 없는 동요를 일으켰다. 여자가 멀어질수록 마음이 급해졌다. 유진은 다급하게 여자를 붙잡았다. 붙잡힌 여자의 당황한 눈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자신이 입고 있던 새 캐시미어 코트를 벗어 꼭 주고 싶다는 말만 늘어놓고("언니한테 꼭 필요할 것 같아요.") 거절하는 여자의 말을 다시 거절하며 검정 캐시미어 코트를 끝내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쉬웠다. 나머지 옷들도 전혀 본 적 없는 남에게 거절하는 것을 거절하고 대가 없이 전부 팔아버렸다. 11월의 날씨가 꽤나 추웠다. 유진은 가벼워진 가방을 몸에 느끼며 열이 오를 만큼 뜨겁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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