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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잔 Dec 10. 2023

새마음금고

은행 달력

한 때, 지혜는 신용이 불량해졌다. 몇 해가 지나 거의 완벽하게 회복했지만, 그러는 동안 나이도 들어 딸이 자기 명의로 통장과 체크카드를 만들어 준 걸 여전히 쓰고 있다.


휴대폰이 울려 받아보니 엄마였다. 훈아, 엄마가 새마음금고에 보험료 입금하려고 갔더니 카드가 다 됐네. 있다 시간 되면 다녀와봐. 싱크대 위에 보면 애들 줄 거 용돈 10만 원 주고, 8만 원 보험료니까 입금해 줘. 엄마는 올해 칠순이 되었는데 여전히 한창때처럼 일을 하고 있고, 월급날에 내 딸들에게 5만 원씩 용돈을 준다. 예전에는 엄마가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다면서도 기어코 일을 하는 모습이 못마땅했다.


그렇게 해서, 내 명의로 되어 있지만 엄마 카드인 사랑드림 체크카드를 들고 새마음금고에 가게 되었다. 엄마 집에 가보니 들은 데로 싱크대 위에 만료된 체크카드와 현금이 놓여있었다. 18만 원이어야 할 돈이 그새 이자가 붙어 23만 원으로 불어있었다. 일하는 엄마한테 전화했다. 어? 5만 원이 몇 개야? 4개? 하하하. 엄마가 웃는다. 엄마 요새 돈 많다더니 내가 그냥 쓸 걸, 괜히 말했네. 내가 웃기려고 한 말을 듣고 엄마가 한번 더 크게 웃더니 5만 원은 집에 갈 때 장보라고 한다. 엄마 말에 한 번만 예의로 거절하고, 못 이기는 척 통화를 끝냈다. 예전이면 몇 번이고 거절하던 나는 요새 달라졌다. 5만 원을 들고 장보기가 예전만큼 신나지도 않은 걸 뭐. 일을 할 때 신나 하는 엄마를 이제 말리고 싶지도 않은 걸 뭐.


번호표를 뽑으니 스물세 번째 손님이었다. 다닥하게 붙은 다섯 개의 창구에 돈 때문에 온 손님은 별로 없고 달력을 받으러 온 손님이 가득했다. 23번째 손님이었음에도 5분 정도 후에 카드를 교체하기 위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시끌시끌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할머니, 할아버지 손님이 잔뜩 보였다. 중간 자리에 앉은 머리카락을 반만 묶은 눈이 동그란 여자직원이 말아놓은 달력이 없다며 손님들을 돌려보내려고 시도했다. 따끔한 직원의 말에 한, 두 명의 할아버지들이 빈손으로 돌아갔지만, 몇 초 뒤 단체관광이라도 온 듯 밀려들어 온 손님까지 막을 수 없었다. 지점장이 말아놓은 달력 핑계를 댔지만 이미 한번 써먹은 시도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데모에 무산되었다. 이번에는 번호표를 뽑으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바닥에 떨어진 번호표를 가져다주는 둥 차라리 빨리 달력을 마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두 권이상은 줄 수없다는 쪽과 그 이상을 요구하는 실랑이까지 벌어졌다. 다른 한편에서 키가 큰 남자직원이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에게 손가락 세 개를 팔랑거리며 비키라는 듯 신호를 주고 멀쩡한 의자를 끼웠다 뺐다 하는 모습도 보였다.  

어휴, 은행달력을 왜 저렇게 좋아해. 들릴 듯 말 듯 한 창구직원의 말을 끝으로 시끌 거리는 현장을 급히 빠져나왔다.


엄마집에 돌아가기 위한 약도를 위한 설명글. -> 비교적 큰 대로변에 위치한 새마음금고는 비탈진 곳에 위치한다. 언덕 위에서 아래로 100m를 걸어 내려가 큼직한 횡단보도를 건넌다. 한적한 2차선 도로에 들어서게 되면 다시 50m를 걸어 나타나는 놀이터를 왼쪽으로 두고 빌라가 양쪽으로 나란히 서있는 골목으로 들어간다. 50~70m를 직선으로 걷는다. 폭이 좁고 가파른 고개를 올라 유리문이 깨끗하게 닦인 한성빌라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50m를 걷는다. 우편에 짧지만 비탈이 높이 선 엄마집이 나타난다.


엄마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은 노인이었다.

배추 흥정을 하고 있던 젊은 할머니의 머리카락이 긴장감 있게 말려있었다. 키가 작고 새하얀 머리카락 위에 빨간 털실 모자를 쓴 할머니의 뒷짐에 달력이 쥐어져 있었다. 과일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는 만지면 부서져 내릴 것 같은 피부 안에 고요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잘 가던 고깃집은 낮에는 불을 지피지 않는다. 낮의 가게 앞에 앉아 무심하게 담배를 태우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나도 무심히 지나쳤다. 놀이터를 지나 들어선 길에서, 다리를 약간 저는, 이제 막 할아버지 주름이 생기려는, 얼굴이 거뭇하고 품이 큰 검은색 항공점퍼를 걸친 60대 아저씨가 소주병이 몇 개 든 검은 봉지를 들고 비뚤게 걷는 모습과도 만났다. 은행에서부터 집까지 셀 수없을 만큼 다양한 노인의 얼굴과 머리모양, 키의 크기, 검정신발, 꽃이 달린 신발, 털이 달린 신발, 잘 구분이 가지 않지만 미세하게 다른 얼굴들을 보았다.


마지막 비탈길을 올라 5층 빌라의 대문을 열고 내 생일로 조합된 비밀번호를 누른 후, 101호의 문을 열었다. 싱크대에 새로 발급받은 체크카드와 8만 원이 찍힌 명세서를 올려놓았다. 몸을 돌려 나오려는데 단단히 말린 새마음금고 달력 두 권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장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빈 손으로 집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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