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잔 Jan 16. 2024

관찰

선아의 소설

그때부터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런 상상은 자비 없이 갑작스럽게 실천되었다. 모든 매체에서 생명 연장을 선전했다. 어떤 사람들은 괴로워했다. 과거 인류가 지녔던 보편적 감성은 현재 인류가 보기에 -그때는 맞았겠지만 지금은 틀립니다- 정도로 이해될 뿐이겠지만, 그러나 분명히 그때의 사람들은 죽지 않는 삶을 두려워했다.


천재 소설가 온선아가 살았던 작은 집은 9월에 내린 이른 눈으로 얼음집이 되어 갔다. 9월에 눈이 온 것은 22세기에 들어서 어떤 징조도 아닌 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온선아의 마른 몸을 향해 뚫고 들어오는 냉기를 어떻게도 막을 수 없었다.


내가 작은 마당을 품은 ㄱ자 지붕을 머리에 쓴 온선아의 집 앞, 5층 빌라의 3층으로 이사 한 날은 화가 날 정도의 장대비가 쏟아졌다. 담장에 쌓였던 눈이 너무 빨리 사라지고 있었다. 며칠 동안 짐을 정리하고 쉴 틈을 찾아 부엌과 연결된 베란다로 나갔다. 버튼을 두 번 눌러 창문의 1/3을 열었다. ㄱ자 지붕이 내려다 보였다. 캡슐 담배를 입에 넣었다. 입에 찬 하얀 연기를 바깥으로 뱉어 내자 파란 꽃 모양을 만들고 사라졌다. 지붕 아래에서 여자가 나왔다. 손에 두껍게 포개진 한 뭉치의 종이가 들려 있었다. 괴상한 콜라보의 결과물 같은 양옥집+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손에 든 종이뭉치를 신중하게 넘기며 글자를 따라 움직이는 갈색 눈동자를 보고 '내 집에 종이가 한 장이라도 남아있는지' 떠올렸다. 송이와 이혼 절차를 밟을 때도 종이 대신 전자 사인 하나면 됐는데. 보이면 보여주는 대로 틈틈이 온선아를 관찰하게 된 첫날이다.


저녁을 먹고 종이 담배 생각에 바깥으로 나갔다. 11인승 승합차가 도로와 맞닿은 신종 주택과 빌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운전석의 문이 열리고 여자가 혼자 내렸다. 빌라 주차장에 서 있던 나와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서로 목인사를 했다. 온선아가 나를 처음 보았다. 밤 9시가 넘어 쓰레기를 가지고 내려갔을 때 한번 더 마주쳤다. 쓰레기 자동분쇄기 앞에 서서 동시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사 오셨어요?

네.

여기 사시죠?

네, 여기 뒷 집이요. 마당 있는.

네, 들어가시는 거 아까 봤어요.

아, 네. 아직 그걸 피우시네요?

네.

3층에서 종종 내려다보고 있기에 초면은 아니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들어갈게요.

네.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색과 비슷한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자가 외출을 하려는지 어깨에 작은 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선다. 동시에 교복을 입은 앳된 얼굴의 여자아이가 철컹 소리를 내는 대문을 밀고 들어왔다. 아이를 발견하고 여자는 반가운 얼굴을 지어 인사하고, 여자아이도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녁 7시쯤 주차장 바깥쪽으로 나와 입에 물고 있던 하얀 담배 연기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 멀리 걸어오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마침내 가까워진 여자와 목인사를 했다. 여자가 집으로 들어가기 전 가방에 있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혼자 사세요?

여자가 내게 물었다.

네, 돌싱이요. 


회색빛의 돌바닥을 따라 높이가 다른 빌라들이 늘어선 골목을 걸었다. 오래전, 골목의 끝 모퉁이 자리에 사이키델릭 한 스타일의 간판을 단 부동산이 들어서기 전,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철물점이 있었다.

신혼집으로 선택한 빌라에 이사를 왔을 때 짐을 정리하면서 tv 케이블을 사러 들렀던 기억이 났다. 산책을 위해 나선 길은 그런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과의 인연을 되새기게 하는 식이 되었다. 예전 그대로인 것들과 미래의 것들이 뒤섞여 보이는 풍경이었다. 큰 도로를 피해 반대 방향을 향해 좁은 골목들을 따라 걸었다. 덩치가 큰 목련나무가 담장 안으로 몸을 숨겼으나 봄바람에 피운 꽃잎이 커다란 얼굴을 바깥으로 내밀었다. 그 저녁, 돌싱이라 말하며 실없이 웃어 보였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와 고개를 숙였다. 언덕을 올라 단지형 빌라들이 이웃해 서 있는 뾰족한 지붕 위로 떨어진 햇살이 봄기운을 고조시켜 겨울 동안 몸에 밴 냉기를 걷어갔다.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었음을 맹렬히 선전했다.


깍지 끼고 싶어.

온선아는 꽉 잠긴 창문의 잠금장치를 풀어 5월의 바람이 들어오게 했다.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시 들을 수 있도록 등 뒤에 바짝 붙어 내가 말했다. "깍지 끼고 싶어. 같이 산책하고 싶어." 짧게 자른 검은색 단발머리 안으로 선아의 감춰진 귀가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 뒤로 물러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온선아는 뒤집어진 옷을 주어 바르게 펴 몸에 입고 방문의 문을 열고 나갔다. 옷을 대충 주워 입고 뒤따라 나가보니 부엌 베란다에 조심성 있게 서서 창문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3층인데 꽤 높구나. 여기서 나 많이 봤어?

가끔.


그렇게 됐어.

봄기운에 그런 건지 봄감기 때문이었는지 숨기지 못하고 친구 녀석에게 고백했다. 전화로 서툴게 털어놓은 고백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내내 같이 다닌, 두어 번 정도는 같은 반이기도 했던, 오랫동안 한 동네에 살다가 결혼 후 30분 거리에 있는 동네로 집을 옮긴 친한 친구였다. 이혼 후, 8년 동안 동네를 떠나 춘천에 살 때도 정 있게 챙겨주었다. 며칠 후 집 근처로 찾아왔기에 술자리에서 온선아에 대한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토해냈다. 세월이 잔뜩 묻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하듯 대답하는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그래, 그거 알아 인마. 누구는 안 해봤냐. 너 예전에도 그랬어. 근데 송이 씨랑은 전혀 연락 안 해?


9월의 첫눈이다. 온선아와 함께 본 네 번째 첫눈이었다.

여기서 보면 이상해.

부엌 베란다에서 자기 집에 쌓이는 눈을 보며 이상하다고 말하는 온선아를 식탁 의자에 앉아서 감상하듯 보고 있었다. 살이 별로 없는 온선아가 별로 옷을 걸치지 않고 별로 감정이 없이 서 있는. 온선아가 집에 올 때마다 자기 집을 보고 서서 중얼거리는 모습이 온선아와 헤어진 후 매우 소중한 기억이 되었기에 나중에는 횟수를 정해놓고 떠올릴 정도였다. 자주 떠올리면 결국 무뎌지고, 그래서 온선아가 닳아 없어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만 끝나면 같이 여행 가자.

수현이 시험인데 괜찮아?

애들 뉴스엔 통 관심 없구나? 이제 그런 거 안 중요해. 모양새만 남겨놨지, 없어진 거나 다름없어. 이상하지? 세상이 변하려니까 이렇게 쉽네.

그 말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오자 몇 분 지나지 않아 골목에 들어선 기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자동화는 거의 모든 일상에 급격히 스며들었다.  


선아의 소설이 50개국의 언어로 번역되고 부커상 수상자가 되었지만 온선아는 상 받기를 거절했다. 그 어떤 상이라고 해도 거절했을 것이다. 온선아는 고집스럽게 종이 담배를 피우고, 안전 과민증으로 집보다 큰 차를 타고, 종이에 연필로 글을 쓰고, ㄱ자 지붕을 고치고, 어울리지 않는 양옥집 툇마루에 앉아 시간이 자신을 스쳐 가고 있음을 지켜봐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라는 것을 끈기 있게 관찰한 사람만이 알 수 있었다. 그 해가 지나가기 전, 온선아의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온선아의 건강은 시한부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때부터 마음만 먹으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기에 혼자 남을 걱정은 하지 못했다.


가족과 스위스 여행을 떠난 온선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랑 오고 싶었어.

응.

다시 태어나지는 않을 거야. 다시 쓰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

온선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사랑에는 늘 서툴렀기에 예상하지 못했다. 우물쭈물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감당하기 힘들었다. 온선아가 남긴 것들을 붙잡고 온선아가 없는 세상에 태연해지기 위해, 일상을 연습으로 채워나갔다. 몇 번이고 생명을 연장했다. 친한 사람들이 전부 사라지고 낯선 사람들과 살아가게 되었을 때에도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다시 태어났다. 죽음의 안식이 간절할 때도 있었지만 창가에 서있던 온선아의 기억과, 온선아가 남긴 마지막 소설- 성숙해지는 겨울- 속 당부가 끝없이 생명을 연장시켰다.


 





  







이전 11화 황홀한 해 질 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