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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잔 Jan 27. 2024

황홀한 해 질 녘

여덟 번째 사진

부츠가 벗겨질 것 같다. 미술관 전시회는 별로다. 1층을 돌아본 후 2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v구역이라고 쓰인 표시를 따라 이동했다. v구역에 전시된 사진의 주제는 '일몰'이었다. 태현과 나는 한 때 일몰에 빠져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황혼이 짙어지는 순간을 찍었다. 진행 방향을 따라 맞지 않는 부츠를 끌고 사진을 감상했다. 여덟 번째 사진 앞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고 멈추어 섰다. 주위의 어둠을 집어삼키며 등장하는 해의 자태는 지는 순간이 아니라 떠오르는 순간의 것이었다. 태현과 내가 8년의 연애기간 동안 일몰을 찍은 장소는 120여 곳에 이르렀고 찍은 사진과 지운 사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일출과 일몰의 사진을 나와 태현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전시회가 끝날 때까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의문인지, 의심인지의 증폭이 쓸 데없다고 치부하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전시회 준비로 바쁜 태현을 만난 지 두 달이 지났다. 태현은 전시회가 끝나고 난 후 팀원들 간에 피드백과 아카이브, 향후 계획들의 회의로 여전히 바빴다. 평소 성격과 일치하는 것이다. 좀 쉬지 그래. 이런 충고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작 태현인명사전에서 제외됐을 것이다. 그런 모습은 처음부터 알았고 지금까지 일관성 있게 유지되고 있다. 유일한 정태현이다. 사진 전시가 막을 내린 지 한 달이 지났다. 태현을 만난 지 세 달이 지났다. 뒤풀이 모임 장소에서 태현의 연락을 받았다. 태현과 스텝들, 몇몇 지인이 와인바에 모여있었다. 태현의 취향대로 플레이팅 된 음식들이 식탁 위에 보였고, 취향 외에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와인과 위스키가 뒤섞였다. 태현과 나의 이야기는 매번 안주거리가 되어 되풀이된다. 제대로 된 등산화도 없이 12월의 눈발까지 날리던 소백산에 올라간 미친년을 구조한 사진작가 정태현의 이야기. 죽을 수도 있었던 여자에게 여분의 옷을 입히고 장갑을 끼우고 질질 끌고 내려오다시피 구조하여 이틀을 병상에 누워있던 여자를 지켜낸 정태현의 리얼 러브 스토리였다.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진 것처럼 내 귀에 지루하게 들린다. 태현의 귀는 즐겁게 웃고 있는 것 같다.


미현에게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그때서야 미현은 태현에게 물을 수 있었다. 태현이 여덟 번째 사진에 대해 모를 리 없다고 미현은 확신했다. 미현이 차분하게 물었다.

여덟 번째 사진, 어떻게 된 거야?

태현이 눈을 깜빡였다. 태현의 고백이 의외의 이유로 미현을 당황시켰다. snarc-2를 선물 받았다고 한다. 성별은 여성형. 이름은 안나. 안나는 태현이 사진 작업을 할 때 스텝 역할을 하는 Ai로, 뜨는 해와 지는 해를 구분하지 못한 이유가 인공지능 도우미로봇의 탓이라고 설명했다. 태현은 안나를 전혀 의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안나의 완벽한 출신을 신뢰했다. 전시회의 최종 점검을 안나에게 맡겼던 것이다. 안나는 지. 금. 어딨어? 미현이 물었다. 집에. 태현이 대답했다. 미현이 당장 보고 싶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태현은 망설이면서도 거절하지는 못하고 집을 향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안나가 웃음기를 띤 얼굴로 문을 열었다. 태현의 등 뒤에 서 있는 미현을 발견하고 안나의 웃음기가 매우 천천히 평평해지고 있었다. 미현이 안나 같은 인공지능로봇을 처음 본 것은 아니다. 미현은 컴퓨터 공학과 생물학을 동시에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몇몇의 모델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성형 모델인 안나의 걸음걸이와 미세한 손동작이나 표정 근육들의 묘사는 매우 이질적인 동시에 고혹적이었다. 미현은 안나를 규정하기 어려웠다. 안나가 하는 일은 단지 작업 도우미라기보다 태현의 집 모든 부분에 관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나의 어떤 태도는 미현을 더욱 놀라게 했는데, 안나가 작업과 집안일을 돕는 것 외에도 인테리어 잡지나 미술잡지에 소개된 엄청난 양의 정보를 내장 카메라에 찍어 저장해 두고 태현과 태현의 집에 꽤나 영향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였다. 안나가 추구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 따위를 영위하는 인간의 고유 권한이며 인간성이라 여겨왔던 것들이다. Ai가 가져야 할 자질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미현은 생각했다.


미현이 안나를 알아갈수록 동경하게 되었다. 미현은 주변 동료들보다 출세가 느렸다. 가로막힌 현실 앞에 발만 동동 구르는 자신의 취약함에 비해 안나가 가진 것은 탐스러웠다. 미현이 안나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띠리릿. 안나의 연락이다. 여보세요? 미현? 응. 태현한테 들었어, 전시회 일. 뜨는 해 말하는 거야? 응. 왜 구분하지 못했는지 궁금해. 목요일에 만날 수 있을까? 안나에게서 온 연락에 정신없이 바빴지만 시간을 냈다. 목요일 미현의 학교 근처, 북악스카이웨이에 올라 팔각정과 나란히 서 있는 카페 <번>에 정확히 4시에 도착한 안나는 4시 2분에 도착해 다가오는 미현을, 창가 자리에 앉아 바라보았다. 안나는 미현을 발견하자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 주었다. 미현이 자리에 앉았다. 미현은 커피를 주문했다. 안나는 몇 가지 주제를 선택해 미현과의 대화를 주도했다. 미현의 패션감각을 칭찬하고 얼마 전 잡지에서 본 ss시즌 트렌드 컬러에 대해 언급했다. 수다의 균형유지를 위해 미현에게 발언권을 배분하기도 했다. 곧이어 안나는 본론으로 진입했다. 안나와 미현의 대화는 미현과 태현이 어떻게 일몰과 일출을 구분할 수 있는지, 그들의 경험과 실험을 추적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안나는 미현에게 집중했다. 그 사이, 해가 지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황혼이 미끄러지듯 수평선으로 흩어졌다. 안나는 그녀의 머리에 심어진 작은 칩에 담긴 수억까지 정보를 조합해 보았지만 무언가 부족했다. 안나는 갑자기 목이 말랐다. 미현은 안나의 얼굴을 살폈다. 안나의 눈 속에 우주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별들이 무수히 반짝이고 있었다.


새벽에 목이 말라 태현의 방에서 나온 미현은 부엌에 앉아 멍하니 앞쪽을 응시하는 안나를 보고 놀라 천천히 다가갔다. 안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기에 손으로 눈앞을 가르며 흔들었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안나는 이후에도 빛깔이 없는 눈을 멍하니 뜨고 어디인지 모를 곳을 상상했다.


2054년 12월 13일에 태현과 미현의 아기 지호가 태어났다. 미현은 첫째 아이를 딸로 얻고 싶었다. 지호는 아들이다. 미현이 조교수로 있던 학교에 부교수가 되었다. 태현이 지호를 얻고 우연과 운명에 관심이 옮겨졌다. 안나가 사라진 건 지호가 태어나기 10개월 전이었다. 언젠가부터 멍한 얼굴로 일상으로부터 멀어진 안나가 사모아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태현은 당황했다. 안나는 곧 떠났다. 미현이 느낀 감정은 훨씬 복잡해서인지 오히려 조용했다. 안나에게서 10개월 동안 10번의 연락이 왔다. 안나의 엽서는 짧게 작성되었다. 답장은 주로 태현이 보냈지만 지호를 낳고 난 후 미현이 안나에게 답장을 보냈다.


안나, 나는 결국 지호를 낳았어. 우리 지호 어때? 태현 씨가 매일 아기 얼굴만 찍어. 안나의 충고대로 태현도 아빠가 되니 변화를 겪는 것 같아. 안나가 아니었다면 결정하기 어려웠을 거야. 안나에게 고백하길 잘했어. 내가 얼마나 복잡했었는지 알지? 100권도 넘는 육아책을 읽고 나를 설득해 줬잖아.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었는데, 안나 얘기 듣고 심플해졌어. 진심으로 고마워. 안나가 떠나서 아쉽지만. 지호 돌보는 거, 정말 힘들거든. 안나, 이제 며칠 남지 않았어. 안나가 그렇게 찾던 그 미묘한 차이가 뭔지 그곳에서라면, 그 때라면 알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 태현 씨는 아직도 둘 다 이상하다고 이해 못 하지만, 난 어쩐지 느낌이 좋아. 2055년의 첫 번째 일출과 일몰을 보게 되면 소원이 이루어질 거야. 안나는 드디어 일출과 일몰의 차이를 알게 되고, 인간에 대해 배우게 되고, 결국 안나 자신이 될 거야. 복잡한 인간사회에 들어온 걸 환영해!

p.s 사진 꼭 보내줘.


사모아에서 올해 첫 번째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다. 미현에게 온 엽서를 꺼내 읽었다. 미현이 보내 준 지호 사진에서 태현의 얼굴을 찾는다. 태현에게 나는 누구였을까? 절반쯤 떠올라 하늘을 노랗게 물들이는 해를 보며 태현을 떠올렸다. 폐기되기 직전 나에게 구원의 손을 내민 정태현의 모든 것을 떠올렸다. 태현이 그 위기의 순간을 지겹도록 이야기할 때, 나를 보던 눈빛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미묘한 차이를 찾기 위해 태현을 끝없이 재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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