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모재 김안국이 왔다. 열 살짜리 어린 하서를 만나러 맥동마을까지 친히 온 것이다. 그 방문을 인연 삼아 아비는 아들을 전주, 김안국에게로 보냈다. 낮에도 호랑이가 나온다는 장성 갈재를 넘어 하서는 수백 리 길을 갔다. 이미 한번 다녀온 적 있던 그곳 전주였다. 김안국은 전라감사로 재직 중이었던지라 낮에는 근무하고 밤에는 하서를 가르쳤을 것이다. 유학이란 『소학(小學)』부터 시작한다고 믿는 김안국에게 하서는 굳이 『소학』을 배우겠다고 간청한다. 『소학』은 효도에 중점을 두되 어떻게 몸가짐을 바르게 지녀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일러주는 책이다. 『소학』을 읽지 않았을 리가 없는 하서이지만, 책이란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그 깊이와 높이가 달라지는 법이다.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 조기유학을 온 셈이다. 스스로 의문을 갖고 질문하며 깨닫기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하서는 어린이답지 않게도, 아는 것을 뽐내어 칭찬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다소곳하게 배움에 힘써 열한 살 무렵에는 『소학』을 읽다가 뜻에 맞는 곳을 만나면 기쁜 나머지 잠을 설치기에 이른다. 그의 몸에 밴 언행이 실은 다 책에 있는 대로였을 테니, 책이 사람의 모습을 취하여 나타난다면 하서 그대로였을 것이다. 아마도 아들을 길러봤을 김안국도 책(責)을 잡히지 않는 하서의 의젓한 말과 행동에 찬탄을 마지않으며 “이는 나의 어린 벗이니. 참으로 삼대에 있을 인물”이라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떤 부모가 애를 저렇게 잘 가르쳤을까?” 하고 그 부모를 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애가 있다. 그렇게 하서도 삼대 즉 중국의 하은주 시대에나 있었음직한 애로 보였던 것이다.
하서는 어릴 적부터 주변 사람들의 칭찬만 들어왔다. 하지만 배움이 점점 무르익으면서는 세상이 얼마나 넓으며 뛰어난 인물이 얼마나 많은지를 뼈저리게 깨닫는 날이 온다. 어느덧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교훈에 하서도 마음이 쓰인다. “『시경(詩經)』을 배우지 않고는 남과 이야기할 수 없다”고 공자가 가르친 바, 그 말씀을 좇아 많은 이들이 『시경』을 읽어 왔었다. 그리고 하서도 13세에 『시경』을 읽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국풍」을 천독(千讀)하는데 이것은 『시경』에 나오는 민간가요 160편이다. 「국풍」은 백성의 생활 감정과 남녀의 애정, 현실 비판과 원망을 그린 시가다. 하서는 그 시가뿐만 아니라 그 시가의 해설서도 읽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작품만 읽은 것이 아니라 그 평론까지 읽은 것이다.
『소학』으로 품성을 연마한 하서가 「국풍」으로 정서까지 연마하기에 이른다. 훗날 하서의 시에는 “내 마음 돌이라 구를 수 없네” 라는 표현이 나온다. 국풍 중 「七月」에 나오는 구절이다. 하서는 자신의 결심이 확고함을 나타내기 위해 이 말을 인용했다. 몸에는 단정한 자태가 배이고 말에는 감성을 표현하는 언사(言辭)까지 지녔다. 수신(修身)이 끝났다. 이제는 제가(齊家)할 것이다. 하서는 일 년 후, 14세에 아내를 맞이하고 15세에 첫아들을 얻고 16세에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14세 소년이 여인의 언어를 이해하는 건 남편 되는 법과 아비 되는 법을 배우고 익힌 것에 다름없다. 더할 나위 없이 어여쁜 꼬마 신랑과 꼬마 신부였을 것이다.
그러고도 하서의 스승을 찾는 구도의 걸음은 늦추어지지 않았다. 17세에는 면앙정 송순을 담양으로, 18세에는 신재 최산두를 화순 동복으로, 그리고 눌재 박상을 광주로 찾아뵈었다. 사서오경은 물론 폭넓은 책들을 읽어온 하서다. 과거 급제를 위한 족집게형, 맞춤형, 눈높이 학습이 아니라 더욱 깊이 깨닫고 배우기를 원하는 이 젊은 선비의 학구열이 얼마나 이뻐 보였을까. 비록 불우한 상황에 있었지만, 스승들은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었을 것이다. 눈 밝은 박상이 하서를 두고 의미심장한 평을 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그는 말하기를 “자고로 기동(奇童)은 좋게 삶을 마치는 자가 없으나, 오직 이 아이는 마땅히 영종(令終)할 것이라” 했다. 하서의 온화한 성품을 꿰뚫어 보고 그 치우치지 않은 중용의 자세를 높이 산 것이다.
그 하서가 약관 19세에 한양의 백일장에 참가한다. 시제는 칠석(七夕).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를 건너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칠월칠석이다. 쟁쟁한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도도하게 붓을 들었다. 이제껏 호남 일대 인물들만 교유해 왔지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꿈이 없지 않은 하서도 이 전국구의 한판 겨룸에 참가한다. 이때 하서가 쓴 것이 칠석부(七夕賦)다. 부(賦)란 ‘옛날의 산문시’이다 하서는 견우직녀의 사랑을 절절하게 그려내고는 수 자리 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와 귀양을 간 신하의 심정을 내세워, 그래도 너네는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만나지 않느냐고 한다. 국경을 지키는 군인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서러움과 더불어, 중국 시인 소동파를 가리킨 듯한 땅끝으로 내쫓긴 신하의 연군(戀君)의 정에 이르는 순간, 서정시는 참여시로 돌변한다. 시는 읽는 이의 의표(意表)를 찌르고, 당당히 장원을 차지한다.
심사위원장은 놀랐다. 출중한 한양 선비들을 제치고 장원을 차지한 게 젊은 시골 선비라니, 못 미더운 나머지 재확인을 했다. 하서를 불러 글제 일곱 개를 더 줬는데 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즉석에서 답안을 작성했다. 그 중에서 「염부(鹽賦)」와 「영허부(盈墟賦)」가 오늘까지 남아 있다. 「염부」는 소금을 주제로 한 시다. 다섯 살에 생 파(‘대파’, ‘쪽파’ 할 때의 그 파)를 끝까지 까던, 세밀한 관찰력을 지닌 아이가 소금인들 눈여겨보지 않았으리, 제목에 ‘부’가 붙었으니 길기는 또 오죽 길었으리, 아무래도 재시험을 볼 준비를 해온 걸까, 싶은 상황이다. 어른한테 소우(小友)라고 불릴 만했겠다. 심사위원장은 거듭 탄복을 금치 못했다.
1528년은 하서의 해였다. 「칠석부」는 하서에게 현대의 BTS에 못지않은 인기를 가져다준다. 뭇 여인들의 마음을 울렸고 장안의 기생들이 앞다투어 그의 시를 낭랑하게 읊었다. 「칠석부」를 잘 외우던 여종이 열일곱 나이에 하필이면 칠월칠석날 숨을 거두기도 했다고 한다. 글로 인정을 받은 하서에게는 나중에, 벼슬을 받기도 전인 성균관 학생 시절에도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이 맡겨지기도 했다. 칠석부는 훗날 중국까지 진출한다. 명나라 사신이 조선의 뛰어난 글과 책을 청했는데 이 「칠석부」가 율곡 이이의 책과 함께 뽑혀 한류의 원조로 중국 대륙을 밟았던 것이다.
다음은 「칠석부」를 간추려 쓴 것이다.
칠석부(七夕賦)
가을바람 소슬하게 이는 저녁, 은하수가 희게 빛나고
멋진 낭군과 만나기 좋은 때, 구름 치마 찬란하게 떨쳐입고
꿈틀거리는 푸른 용을 타고 은하수 나루로 달려 오작교를 건너네
이슬이 계수나무 궁전에 엉기어 빛나는 밤,
신선의 옷자락을 맞잡고 함께 거닐면 임의 말씀에 시름이 사라지네
꽃이 쉬이 시들 듯 이별이 다가와 마주 보며 한숨지어도
달은 서쪽으로 내달리고 하늘 닭이 새벽을 재촉하네
어쩔 줄 몰라 넋을 잃고 걷잡지 못한 눈물만 흩뿌리니
저 멀리 구름이 타오르며 길은 아득하기만 하네
삼백 일 기약에도 하늘과 땅은 무궁하니 또 만날 날 많네
수자리 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와 땅끝으로 내쫓긴 신하는
죽어도 한이 되어 울음을 삼키니 이별의 슬픔은 똑같은 것
견우와 직녀여 헤어진다고 슬퍼하지 말라
이곳에서도 기다리는 사람은 있으니
하서에게서 배우는 것 -
수자리 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와 땅끝으로 내쫓긴 신하는
죽어도 한이 되어 울음을 삼키니 이별의 슬픔은 똑같은 것
견우와 직녀여 헤어진다고 슬퍼하지 말라 여기도 기다리는 이는 있으니
수자리에 간 남편과 땅끝으로 내쫓긴 신하에게는 기약 없는 이별뿐이다. 원치 않는 이별은 잘못된 정치에서 비롯된 상황이다. 절절한 서정시인 듯해도 수신제가를 지나 치국평천하를 바라는 젊은 하서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몸담은 공동체에 기여하는 쪽으로 시선이 이끌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