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3년 4월, 하서 김인후는 세자의 스승이 된다. 나중에 즉위하여 인종이 된 그 세자다. 형 같은 스승 하서를 세자는 무척 따랐다. 한 달이면 열흘씩 하서가 번(番)을 설 때면 숙직실까지 찾아와 밤이 이슥할 때까지 정다운 수다를 떨곤 했다. 한번은 세자가 하서에게 배 3개를 하사했는데 하서는 배 하나만을 먹고 두 개는 아껴 두었다가 고향의 부모에게 드렸다. 그 씨앗까지 아껴 고향 집 뜰에 심었으니 오백 년이 지나서도 15m의 어사리(御賜梨)는 여전히 꽃과 열매를 맺고 있다.
어느 날 세자가 하서에게 묵죽도를 내밀었다. 묵죽도란 멀리 고려 시대부터 승려와 선비들이 즐겨 그려 온, 먹으로 대나무를 그린 그림이다. 대나무는 사군자 중에서도 선비를 나타내는 표상이다. 그리고 묵죽도에는 굳은 성정의 대나무와 잘 어울리는 바위가 보통 함께 그려지곤 했다. 하지만 세자가 손수 그린 묵죽도는 유독 거친 바위 뒤에 위태롭게 솟은 대나무 네 그루였다. 그 그림을 손수 그려 스승에게 내놓고는 굳이 화제(畵題)를 청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까지 필암서원의 경장각에 보관되어있는 「응제제예화묵죽도 應製題睿畵墨竹圖)」다.
묵죽도는 5만원권 지폐의 뒷면을 장식한 그림이기도 하다. 조선의 묵죽화가 탄은 이정(1554~1626)의 작품인데 묵죽도에서는 대나무만 돋보이면 그뿐이라며, 이정은 바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묵죽화가들은 대나무를 잘 치는 데에만 마음을 썼다. 하기는 화가가 바위에 관심을 더욱 가졌더라면 그때부터 그 그림은 묵죽도가 아닌 석죽도가 되었어야 하리라. 그러나 세자는 유독 위태로운 대나무를 꽉 붙잡아주는 단단한 바위를 힘주어 그려놨다.
1543년 1월, 불과 3개월 전에 동궁에 화재가 났었다. 화재는 안채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큰 사건이 늦장 보고가 되고 조사는 질질 끌기만 했다. 하서가 세자 교육을 맡은 4월 그날까지 나아진 게 하나 없었다. 하서는 경연(經筵)에 참가하자 그 이유부터 따져 물었다. 미묘한 정치적인 상황이 하서를 몰아세웠다. 동궁 화재 같은 변고가 더는 없도록,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말이었더라도 아무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말을 하서는 한다. 기묘명현의 신원을 회복하라고. 벌집을 건드렸으니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세자는 자신의 불찰 때문이라고 조사 마감을 요청하고, 사건을 덮는 데만 급급한 아버지 중종은 궁녀의 실화(失火)로 마무리한다.
범인을 잡아 처벌하기는커녕 부덕하여 하늘이 재앙을 내렸다고, 스스로 낮추어야 하는 기막힌 시절이었다. 지존의 몸으로도 가정 폭력의 울분은 피할 데가 없다. 하소연할 데 없는 처지를 세자는 아슬아슬하게 낭떠러지 바위틈에 솟아난 대나무에 빗대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하늘을 향해 치솟은 대나무를 통해, 위태로운 세월을 이기겠노라는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세자의 마음을 모를 리 없던 하서는 바위를 충성스러운 신하에 빗대어 충성을 다하겠으니, 대나무인 세자는 임금의 뜻을 갖추라고 권하는, 스승의 시를 제자의 그림에 나란히 적었다.
「묵죽도(御製墨竹圖)」의 화제(畫題)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새가 모두 다 정미하니(根枝節葉盡精微)
바위를 친구 삼은 뜻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石友精神在範圍)
성스러운 우리 임 조화를 짝하심을 깨닫노니 (始覺聖神伴造化)
천지와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십니다 (一團天地不能違)
이렇게 그림에 글을 청하는 장면은 최명희의 『혼불』에도 나온다. 등장인물인 이징의는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마음은 양반이자 선비 그 자체다. 그가 자기의 난(蘭) 그림을 선물했을 때, 매안 이씨 문중의 문장(門長)은 ‘어떤 글을 써야 할까?’ 하고 그의 의중을 떠본다. 「묵죽도」의 훈훈한 미담이 전해 내려와, 화제 없는 그림은 물음표를 그린 시험지격이 되었으리라. “뭘 쓰려고 하느냐?”고 이징의는 짐짓 딴소리를 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거기 그래 놓지 않았습니까”라고. 그건, 뜻을 이루지 못한 임금과 신하의 아픔이 함께 전해 내려온 까닭일 수 있다.
역사는 역사대로 흐르지만, 대나무와 바위가 함께 어울려 묵죽도를 완성한 것으로도 족한 게 아니었을까. 평생 울어줄 사람 하나 있는 것만으로도 인종은 헛산 것이 아닐 터이다. 그리고 평생 울어줘야 할 사람 하나 가진 것만으로도 하서 또한 헛산 게 아니리라. 그렇게, 인종과 하서 두 남자의 브로맨스(!)는 오늘까지 전해 내려와, 그림을 보는 이마다 비운(悲運)의 두 영웅을 기리도록 했다. 그리고 모를 일이다, 그들을 본받는 젊은이들이, 이 시대에 또 다른 「묵죽도」를 그리고 있을지는.
코로나 시국이나 가정 폭력이라는 위태로운 낭떠러지에 우리는 발을 딛고 섰다. 그 낭떠러지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한 이도 있다. 절망에 사로잡혀 뛰어내린 이도 있다. 하지만 큰 바위 하나가 거기에 있어, 얼마 남지 않은 흙을 꽉 붙잡아주는 화분 구실을 해주기만 한다면, 그 충분히 넉넉한 품에서 대나무는 하늘을 향해 힘껏 발돋움할 수도 있겠다. 사람이기 때문에, 네가 날 위해 울어준다면 나는 너의 임금이 되고 네가 날 울린다면 나는 너의 하서가 될 것이다. 그 옛날 바위같이 단단했던 스승 하서를 보여주는, 「묵죽도」를 보러 필암서원에 한번 가야겠다.
하서에게서 배우는 것 -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새가 모두 다 정미하니
바위를 친구 삼은 뜻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하서가 바위를 자처한 건 문장력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다. 여린 세자를,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새가 모두 다 정미한 대나무라 부르며 바위인 자신을 벗 삼아 준 우애에 감사한다. 곁에서 항상 지지하겠노라는 충성 맹세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붕우유신하는 친구 하나만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