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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연가(自然歌)

--동무동무 씨동무

by 정영의

1546년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주로 하서의 주변 인물들에게 피바람이 불었다. 하서가 봄, 가을로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가지 않는 줄다리기를 하는 사이에 양재역 벽서 사건(1547년)이 일어난다. 사가독서(젊은 문신에게 독서휴가를 주는 제도)의 절친인 미암 유희춘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살이를 떠나게 된다. 하서는 한걸음에 달려가, 천 리 길을 떠나 살아 돌아올 기약이 없는 벗과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이별을 서러워했다. 그리고 작별의 시조 한 수를 지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술에 취해 버들가지 하나 꺾었다오

이별의 순간은 다가오는데 한없는 이 정을 어이하리

만 리 길이라, 내일이면 머나먼 길 뜬다지요

저 달이 몇 번이나 밝아야 그대 돌아오려나


“자네가 멀리 귀양을 가니 처자가 의지할 곳 없으이. 자네 아들을 내가 사위로 삼을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게나.” 당시에 유희춘의 여덟 살짜리 아들 유경렴은 나이도 하서의 딸과 걸맞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하서 집안에서는 이 혼사를 반대했다. 벗을 도우려면 다른 방법도 있지 않느냐고 했겠지만, 하서는 반대를 무릅쓰고 셋째딸을 미암의 아들에게 시집보냈다. 죄인으로 몰린 미암 집안에 딸을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 그렇게나 해야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나중에 경렴은 아빠 덕분에 영릉(英陵) 참봉 벼슬을 얻었지만, 변변찮은 벼슬을 하느니 해남에서 자손이나 가르치며 한가하게 보내는 게 나은 줄’ 알 만큼은 현명했다.

성균관 시절 하서가 열병으로 사선을 넘나든 일이 있었다. 전염될까 봐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는 기숙사에서 걱정할까 봐 고향에도 알리지 않고 끙끙 앓던 하서를 보살핀 것이 미암이었다. 성균관 관원으로 한양에 자리를 잡은 그가 몇 달 동안이나 극진히 간호해준 덕에 병이 나은 하서다. 하서는 그 고마움을 평생 잊지 않았다. 1543년 겨울 옥과 현감 시절에 미암이 주자(朱子)의 『효경간오(孝經刊誤)』를 보여주러 왔을 때, 하서는 그책을 친히 필사하여 발문을 지어 붙이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렇게 각별한 사이인 친구가 두메산골 종성에서 고향 사투리를 잃지 않은 십 년 나그네로 고향 꿈만 꾸게 됐다. 그런 미암에게 하서는 삼백 자나 되는 시를 적어 보내며 안부를 묻고 미암도 꼬박꼬박 답장을 보냈다.


與柳氏女 유씨에게 시집 간 딸에게


我友在朔方 내 친구는 북방에 귀양 가 있고

汝夫隨萬里 네 지아비도 만리를 따라 갔구나

秋風意無窮 가을바람에 시름겨운 생각 그지없이

野菊盃觴裡 들국화가 술잔 속에 떠 있구나.


하서는 또 미암의 며느리가 된 셋째딸에게도 시를 써 보냈다. 아비를 보러 가는 사위 편에, 미암에게 시를 보내고, 긴 친정살이 끝에 갓 시집살이를 시작한 셋째딸에게도 시를 보낸다. 사위 경렴이 동무 미암의 유배지인 종성에 가니, 시름에 겨웠을 딸의 심정을 넉넉히 짐작하고 위로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한시(漢詩)도 읽고 이해할 정도로 잘 가르쳐놓고, 정작 아비가 고집부려 출가시킨 시댁에서 배움은 써먹지도 못하고 살아가야 할 딸의 처지가 얼마나 안쓰러운가. 국화주를 마시며 술잔에 뜬 들국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친정아버지 하서는 딸을 떠올려 보았으리라.

1548년 그는 어버이를 모시고 순창 점암촌으로 옮겼다. 순창은 경관이 좋을 뿐 아니라 장성을 떠난 것만으로도, 홀가분했을 것이다. 술과 시에 젖으며, 하서는 작정한 듯 훈몽재(訓蒙齋-어리석은 자를 가르친다는 뜻)를 짓고 찾아오는 후배와 제자들을 가르친다. 뛰어난 제자 중에 송강 정철도 있었다. 송강의 뛰어난 문재 덕에 순창의 한 바위는 대학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군자의 즐거움 중에 세 번째가 바로 뛰어난 제자를 가르치는 일이다. 본격적인 정치라고는 일 년 팔 개월 동안 일했던 옥과 현감뿐, 벼슬살이는 한 오 년이나 될까, 주로 가르치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쏟아온 하서다. 아무 때나 솟구치는 비분(悲憤)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가르치는 일이야 뿌듯했을 것이고 그것은 흡사 공자의 말년(末年)과 비슷하다. 공자만큼이라도 오래 생존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자연가가 이때 여기에서 쓰였다.


자연가(自然歌)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산도 절로 물도 절로 하니 산수간 나도 절로

已矣哉 自然生來人生 將自然自然老 아마도 절로 생긴 인생, 절로절로 늙으리


그래도 부모의 시묘살이 기간에는 놔두던 임금이 1553년 7월, 9월, 11월 그리고 이듬해 9월에 부른다. 1555년 12월까지도 조정은 여전히 하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556년에 일어난 을사명현(名賢) 상소사건은 가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관련자 처벌만으로도 모자라 하마터면 하서까지 연루될 뻔했다. 그러니 하서가 꼭 인종과의 의리 하나만으로 벼슬을 내놓은 게 아니었던 게다. 한마음 한뜻의 동무들을 모조리 잃고 벼슬살이를 할 수 있었으랴. 벼슬살이를 한들, 간사한 무리가 그를 놔두었으랴. ‘못 이기는 체하고 임금의 부름에 응하여 벼슬을 하시지 그랬냐’고 아쉬워하는 이들의 입을 막는 사건이었다.


하서는 미암 유배 13년차(1560년)에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 달이 몇 번이나 밝아야 돌아오려나’ 하던 동무를 기다리다 지쳐 먼 길을 홀로 떠난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팠겠지만 20년 유배에서 약속대로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미암은 독서와 책 쓰기에 몰두했다. 글을 아는 사람이 적은 두메산골에서, 세상 사는 이야기나 학문, 정치에 대해 투철한 소견과 해박한 지식을 가진 미암이 힘써 가르쳐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졌다. 수창시(酬唱詩)로 대화를 주고받던 하서와 미암 두 씨동무는, 후배와 제자를, 장성과 종성에서 길렀다. 시인과 스승인 두 사람의 우정이 이러했다. 호남의 빛나는 풍광 속에서 사람을 살게 만드는 것은 맘에 맞는 동무 하나면 족했다.


하서에게서 배우는 것 -

이별의 순간은 다가오는데 한없는 이 정을 어이하리/만 리 길이라, 내일이면 머나먼 길 뜬다지요/저 달이 몇 번이나 밝아야 그대 돌아오려나

하서는 미암이 돌아왔을 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장성과 종성에서 각각 후진을 양성하며 글 배운 선비의 도리를 다했던 천상 스승들이었다. 그 스승의 도리를 이어받아 문불여장성의 성가를 유지해줄 작은도서관이 필암서원 경내에 문을 열었다. <하서작은도서관>은 한번 가볼 법하고, 오래 보관할 만한 좋은 책이 있다면 비록 낡았더라도 기증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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