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세에 하서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받는다.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도 흠뻑 누린다. 퇴계 이황, 화담 서경덕 같은 젊은 또래 선비들과의 교유는 하서에게 물 만난 고기와 같은 기쁨을 주었다. 지방에 따라 입말이 다르다 해도 선비들은 당대의 표준말 같은 한양 사대부의 말투에다가 촘촘하게 예법에 규정된 몸가짐이 표준화되어, 열 살 정도의 나이 차이는 객지 벗 십 년이라 했다. 지역적인 차이는 오히려 견문을 넓혀 다양한 풍물을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 결과 이윽고 왕년의 기준(하서가 세자의 좋은 신하가 될 것이라고 예견함)의 말대로 하서는 세자를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된다. 세자는 하서를 무척 따랐고 하서에게 배 3개와 어제 묵죽도를 하사한다. 미인에게는 화장품을, 영웅에게는 명검(名劍)을, 그리고 선비에게는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당연히, 책이다. 당시 조선이 독자적으로 개발해낸 인쇄기술로 갓 출판한 따끈따끈한 조선판 『주자대전』한 질을 하서는 하사받는다. 그리고 그가 주묵(朱墨)으로 점을 찍거나 밑줄을 그으며 그 책을 읽고 또 읽어 그것들을 준 세자의 마음을 헤아렸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기묘 명현의 신원 회복이라는 벌집을 건드리고도 별 성과를 얻지 못한 하서는 병약하신 부모를 봉양한다는 이유를 들어 옥과현감을 자청한다. 옥과에서 그가 『소학』의 법도에 따라 선제(先制)적으로 백성을 다스리니 말썽의 소지가 줄어 저절로 선정(善政)을 베푼 격이 되었다.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요순시대의 정치를 이루리라 기대한 하서가 현장 체험 삼아 옥과현감을 자청했다는 말도 있다. 정치란 더러운 것이라고들 하는데 과연 꼭 그렇게 더러워야 하는 것일까? 실제로 겪어봐야 했다. 하서는 그렇게 소소하지만 착실하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한 단계를 밟았다.
그러나 사제지간(師弟之間)의 돈독한 정은 불과 7개월로 끝난다. 임금의 뜻을 헤아리는 신하에게 충성을 다할 여지를 주지 않고 임금이 떠난다. 1545년 중종의 죽음에 이어 즉위했던 인종이 안타깝게도 8개월 만에 급서(急逝)했다. 궁궐을 떠나 옥과에 있던 하서는, 임금의 이른 죽음을 전해 듣고 병을 얻는다. 그는 병을 핑계로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왕과 함께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던 꿈이 깨어진 데다가 미심쩍은 이유로 숨진 인종에 대한 애도가 의혹과 더불어 그의 마음을 좀먹었다.
다음 해 7월 1일 을사사화의 소용돌이가 정국을 휩쓸고 있는 즈음 인종의 첫 기일이 왔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도 많은 선비가 화를 입고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하물며 문정왕후의 서슬이 시퍼런 와중에 인종을 기리는 것은 제 무덤을 파는 일이었으리라. 하서의 귀가 온통 쏠려 있는 궁궐에서도 전 왕 인종의 제사를 치르는 둥 마는 둥 했다. 장성 맥동 마을의 하서에게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하서는 사람을 물리고 인근의 난산암을 찾았다. 그의 곁에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 깊은 아내가 며칠 전부터 꺼내어 놓고 조심스레 맛을 살피던 국화술이 든 술병 하나뿐이었다. 잔을 채워 난산바위에 술을 흩뿌리니 향기로운 국화 향이 코끝을 어지럽혔다. 그 향내가 서러워 하서는 조선 천지에 대놓고 보라는 듯 북향하여 무릎 꿇고 대성통곡하여 울었다.
그러고 나서 종이를 펼치고 붓을 들었다. 그 옛날 아홉 살 때부터 왕희지와 같다는 극찬을 받던 필체로 물 흐르듯 시를 써 내려갔다. 임을 잃어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시,「유소사」다. 하서의 「유소사」는 발 없는 말처럼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퍼져나갔다. 하서의 통곡소리와 피눈물로 얼룩진 난산암에는 ‘통곡대’라는 이름이 붙었고 송강 정철은 만산에 울려 퍼지는 통곡소리를 제재 삼아 시를 썼다. 한때 장안의 뭇 여인들을 울린 「칠석부」처럼 「유소사」는 어지러운 시대에 울분을 삼키던 조선의 뭇 선비들을 울렸다.
유소사(有所思)
君年方向立 군년방향입 임의 나이 서른이 되어가고
我年慾三紀 아년욕삼기 내 나이 3기(1기=12년)가 되는데
新歡未渠央 신환미거앙 신혼의 단꿈을 반도 못 누렸건만
一別如絃矢 일별여현시 시위 떠난 화살처럼 가버린 임아
我心不可轉 아심불가전 내 마음 돌이라 구를 수 없는데
世事東流水 세사동유수 세상사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로다
盛年失偕老 성년실해로 한창 때 해로할 임을 잃었으니
目昏衰髮齒 목혼쇠발치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 희었네
泯泯幾春秋 민민기춘추 슬픔속에 사니 봄가을 몇 번이더냐
至今猶未死 지금유미사 아직도 죽지 못해 살아 있다오
栢舟在中河 백주재중하 잣나무 배는 황하 중류에 있고
南山薇作止 남산미작지 남산에는 고사리가 돋아나는데
却羨周王妃 각선주왕비 오히려 부럽도다 주나라 왕비여
生離歌卷耳 생리가권이 생이별로 권이곡을 노래하다니
더 좋은 세상을 향한 꿈이 깨어져 아프디 아팠을 하서의 마음을 헤아리노라니 내 마음조차 아련하다. 하지만 그 덕에 장성이, 하서 김인후라는 영웅과 필암서원이라는 보물을 얻었음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임금의 「묵죽도」에서 바위를 자처했던 이 신하는 바위처럼 변치 않는 스승으로 남아 후배와 제자들을 길렀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을 기려 서원을 설립하고, 이 서원은 훗날 흥선대원군의 서릿발 같은 숙정의 칼날을 피하여 살아남아 오늘날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하서는 임금을 위해 칼을 드는 사육신 대신 관직을 거부하고 시골에 틀어박히는 생육신의 삶을 선택했다. 연군(戀君)의 슬픔을 절절하게 노래했던 속 깊은 이 남자는 목청을 높여 할 말은 하되 구설수(口舌數)에 오르지 않고, 술을 즐기되 주취로 실수하지 않았다. 조선이 복이 없어 어진 임금을 가지지 못했으나 그 임금을 위해 우는 하서가 다 채우지 못한 눈물 항아리를 그 후로 채운 이가 몇몇이던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가 가장 부러워한 것, 그것은 하서 같은 신하 하나를 갖는 것이었다. 난산암에서 하서는 혼자 울지 않았다.
하서에게서 배우는 것-
인종의 기일을 지킨 것은 단순한 애도가 아니라 조선 팔도에 공개방송을 하는 정치적인 행위였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처신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오른손과 왼손이 서로 다투는 시대에,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은 지키되 할 도리는 알아서 챙기는 하서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듬직하다. 세상에는 흑과 백 말고도 그 사이에 수많은 색들이 있음을 항상 인식하며, 중용을 지키며 또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