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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seniya Jan 06. 2021

불안과 공포의 시간을 지나서...

2020년의 한 해의 마지막 12월을 역사적인 회오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의 주인공으로 살았다.

나에게 12월은 잃어버린 간이 되었다.

12월 이른 새벽, 남편의 기침으로  우리 집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평소와는 다른 기침 소리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소름 끼치는 나의 예상은, 점점 기력이 어지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절망적인 확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부터 나의 집은 철저한 고독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족의 잃어버린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 미국을 들어가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한국은 새로운 전염병인 신종플루로 온 세상이 떠들썩할 때였다.

일반 감기와는 다른 치사율도 높았던 특히나 아이들에게 치명적이었던 신종플루가 만연하고 있던 시기에,  아이들 둘을 한국말을 가르치기 위해서 동네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있을 당시였다.

연일 보도되는 뉴스에서 신종플루의 확산을 방송하고 있었기에, 서둘러 아이들을 유치원에서 집으로 도피시키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혹시라도 신종플루에 걸리지 않을까 연일 근심으로 보내고 있을 때, 모 유명 연예인의 아들의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고, 그 아이와 같은 나이였던 큰 아이가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부모의 마음이란 것이 감기 하나만 걸려도 왠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던 시절에, 고만고만한 세 아이의 엄마였던 나는 유독 다른 엄마들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을 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딸아이의 열을 시작으로  신종플루에 감염이 되었고, 뒤이어  아이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친정아버지와 이 병원  병원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결과가 이틀 이상이 걸린다 했지만, 작은 아이가 확진을 받았기에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타미플루를 처방받아 먹이기 시작했다.

집에는 돌도 지나지 않은 막내아들이 있었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그 당시 병원을 나서는 병원 밖의 하얗게 천막이 처져 있던 그 장면이 나는 아직도 떠오른다.

그렇게 나의 역병에 대한 트라우마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로나가 중국 우한에서 발생하면서부터 나의 역병의 염려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과 이탈리아의 비극을 연일 방송으로 보면서 남의 일 같지가 않았던 나는, 미국에 아직 상륙도 하지 않은 2월부터 걱정으로 정상적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남들이 보면 오버를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지만, 남의 시선은  나의 경험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드디어 처음으로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로나 환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3월부터 아이들의 학교가 전면적으로 문을 닫고 디지털 수업으로 바뀔 때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은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이 시작되는 기점에서 항상 나는 그 안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듯이, 나의 가족은 이 비극의 회오리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남들은 일하던 직장도 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하는데,  오히려 나의 남편은 로나가 터지기 직전에 좋은 직장을 구할 수가 있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바로 전이라 망설일 필요도 없이 귀한 직장이었지만, 팬데믹 기간 동안 필수 직업군에 속해서 매일 일을 나가야만 하는 직장이었다.

팬데믹의 가장 힘든 부분은 건강상의 문제이기도 지만, 살아나가는 경제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몸을 도사리던 사람들이 깊어가는 팬데믹 속에 속수무책으로 사상자가 늘어나도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고,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모든 불행 안에서 어떤 이는 승승장구하고, 어떤 이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빠지는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기 작했다.




사람들의 기나긴 지침은 지금까지 누렸던 일상의 그리움으로 서서히 무뎌져 갔고, 다행인지 나의 주변에서는 아무도 걸린 사람이 없었다.

사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확진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남에도 일상은 어제와 다르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속으로는 두려움에 떨면서 몸은 아직도 일상의 나날들을 기억해, 전과 다르지 않게 사람들은 어울리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 류 중에 하나였다.

일을 하고 있었기에 사람들과 접촉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처음부터의 그런 몸가짐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한 주변에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더욱더 실감하지 못하기도 했다.

나이 많은 기저질환을 가지고 있는 나와 나의 남편이기에 나는 더욱더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무감각해지기도 했다.

갑자기 늘어난 새벽녘의 사이렌 소리와 어느 3월 팬데믹으로, 문을 닫은 동네의  몰 안에 항상 수많은 차로 꽉 차여있던 주차장이 한대의 차도 없이 텅 빈 곳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었다.

항상 막히던 도로가 막힘 없이 뻥 뚫려 있을 때,  시원함보다는 그 도로가 너무나 황망해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은 언제 그랬나는 듯이  도로는 다시 수많은 차들로 막히고,  쇼핑몰은 다시 사람들의 차로 꽉 차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안도의 한숨보다는 아!!! 이 순간들이 참 오래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남편이 아프기 시작하자, 나는 아이들과 바로 격리를 시작했지만 ' 이미 역부족이었다.

3일 이후에 내가 아프기 시작했고, 나의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나는 어느 누구도 돌볼 수가 없었다.

그 이후에 우리 집에서 가장 면역력이 좋았던 1년 내내 감기 하나 걸리지 않았던 17살의 쇠도 씹어먹을 젊은 나이의  아들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과 격리를 시작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나머지 두 아이중 막내는 면역력이 해 감기에 잘 걸리는 아이라 걱정이 되었지만, 나의 몸이 나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들에게 까지 갈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서서히 어가는 미각과 후각은 모든 배고픔을 견디게 해 주었지만,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한국과 달리 확진자 판정이 나면 오로지 양심에 맡기며 , 스스로 모든 걸 감내해 내야 하는 시스템이 되어 버린 미국의 체계는, 숨이 넘어가기 전에만 병원의 문턱에 닿을 수 있어,  그전까지는 오로지 자신과 싸워 이겨내야만 하는 과정이 되어버렸다.

철저하게 외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평상시 아프다는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던 강골인 남편이 열을 내며 앓기 시작하면서, 밤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서서히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그 시간들은 보이지 않는 공포였다.

서로 각자 아픔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대미각을 자랑하던 아들이 기침을 시작으로 미각과 후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보통 8일이 지난 후에 경증으로 갈지 중증으로 갈지가 결정이 된다 하기에,  나는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 날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하루 종일 잠을 자면서 버텨내던 시간이 흐르고, 서서히 나는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기력이 딸리기 시작했다.

아들마저도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 건장하던 아이가 몸이 반 토막이  나버렸다. 힘이 없어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나머지 두 아이들은 어떤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고, 아예 감염이 되지 않은 음성의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이미 걸려버린 사람과 걸리지 않은 사람과의 격리도 쉽지 않았다.

온 가족이 각자 버텨내는 밖에 없었다.

그렇게 거진 한 달을 버텨낸 나의 가족들은 다행히도 모두 무사히 견뎌내고 음성 판정을 받았다.

후각과 미각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로......



원망은 감사가 되고 , 이 상황에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감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절대 그렇게 쉽게 말하지 못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옮길 수 있다는 죄책감을 동반한 무섭고 더러운 바이러스이다.

내가 걸려 아픈 것도 불행이지만, 나로 인한 다른 이에게 옮길 수도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야 할 정신적인 부담감을 함께 가져야 하는 질병이다.

며칠  만해도 17명 중에 하나가 죽는다는 미국의 현실은 어제는 33초에 한 사람씩 죽는다는 기사가 나왔다.

어린아이를 둔 젊은 엄마가 한순간에 아이들을 두고 죽어가도,  그 친구의 마지막을 볼 수 없는 슬픔마저도 함께 할 수 없는 몹쓸 질병임에는 틀림없다.

평상시에도 나의 호들갑에 오버라고 쓴소리를 하던 남편은 이번 일을 계기로 정말 쓸 병이라고 했다.

자신이 당하고 보니 이럴 줄 몰랐단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걸렸지만 자신으로 인해 온 가족이 아픈 모습은 또 다른  미안함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렇듯 자신과 자신의 소중한 가족들이 경험하지 않는 한 절대로 알 수 없는 병이 자신에게 돌아올 때는 이미 늦어버린 경우가 되는 것이다.


이제 점점  가까운 지인들의 슬픈 소식들이 여기저기 들린다.

늙고 젊고 건강하고 약하고 아무도 모른다.

면역력이 좋다고 해서 약하다고 해서도 아니다.

바이러스가 어느 곳에 침투를 할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신이 내린 형벌인지 모를 정도로 한 사람의 이기심으로 퍼져나간 이 바이러스는,  이제 조심한다 해서 막아낼 수 있는 선을 넘어버렸다.


어느 누군가 물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인 바이러스의 경증과 중증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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