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부터 고르는 미국, 메뉴부터 정하는 한국
자주 받는 질문인데, 받을 때마다 잠깐 머리가 하얘진다.
"오늘 뭐 먹을까?"
이 말은 가볍게 던져지지만, 내 마음속에는 이미 수십 가지 메뉴가 뒤엉켜 춤을 추고 있다. 한 순간, 세상 모든 음식이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설레다가도, 금세 결정 장애에 빠진다. 결국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아무거나'. 무심하게 들리지만, 사실 오늘 하루 쌓인 선택의 피로가 슬쩍 튀어나온 결과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결정을 하며 산다. 입을 옷을 고르고, 말의 톤을 고르고, 괜히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삼키는 것까지 포함하면 하루는 이미 충분히 복잡하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친 뒤에 등장하는 오늘 뭐 먹을까라는 질문은, 사실상 마지막 체력 테스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굳이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도 안다. 그냥 더 이상 고르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는 걸.
문제는 그다음이다.
마음대로 해." 혹은 "아무거나."
이 말이 따라붙는 순간, 아무거나는 갑자기 고급 선택지가 된다. 정말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걸까? 너무 느끼하지는 않을지, 어제 먹은 건 아닌지, 혹시 상대는 이미 답을 정해놓고 나에게만 선택권을 넘긴 건 아닌지, 머릿속에서는 소규모 회의가 열린다. 상대의 표정을 읽고 있는 셈이다.
특히 내가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질문을 더 어렵게 만든다. 정확히 말하면 못 먹는 건 아니지만, 굳이 앞장서서 집어 들지도 않는다. 입이 유난히 짧은 나는, 고기를 가끔 필요로 하는 남편과 고기를 좋아하는 딸 앞에서 메뉴를 고를 때마다 은근히 '협상'을 해야 한다.
"난 공깃밥과 된장찌개만 있어도 돼"
속으로 외치며, 솔직히 고깃집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반찬과 된장찌개만 있어도 나, 충분히 행복하다. 고기 굽는 연기 사이에서 한 숟가락, 두 숟가락, 찌개에 마음까지 채우며 살짝 웃는 나를 보면, 남편과 딸은 아마 모른 척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미국에서는 메뉴보다 식당 선택이 먼저다. 같은 테이블에서도 누군가는 스테이크를, 나는 샐러드나 파스타를 고른다. 웬만한 식당에는 고기부터 생선, 파스타, 피자, 타코, 샐러드, 심지어 브런치 메뉴와 퓨전 아시안 음식까지 모두 있어, 누구나 자기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다. 고기를 안 좋아한다고 말해도 설명이 길어지지 않는다. 취향은 결과로 존중받고, 모두가 각자의 메뉴를 먹느라 바쁘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대부분 메뉴가 먼저 결정된다. 오늘 무엇을 먹을지가 먼저 정해지고, 그 메뉴에 맞는 식당으로 간다. 나는 그곳에 가서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고르는 정도다. 고기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잠깐 망설이지만, 속으로는 된장찌개와 비빔냉면을 떠올린다. 국밥집이라도 등장하면 맛있는 김치와 깍두기가 생각나, 괜히 침이 넘어간다.
물론 한국에서도 식당을 먼저 정할 때가 있다. "이 집이 뭐가 맛있다더라" 하고 찾아가는 경우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어떤 메뉴를 먼저 마음에 둔 뒤 식당을 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에세이에서는, 그냥 대부분 사람들이 흔히 겪는 상황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생각해 보면 "오늘 뭐 먹을까"라는 질문은 음식에 대한 것이 아니다.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 괜히 튀지 않으려는 습관, 선택의 책임을 나누고 싶은 심리가 조용히 겹쳐진 결과다. 고기를 안 좋아하는 내 취향도 그 안에서는 하나의 작은 변수로 작동한다. 크지는 않지만, 늘 계산에 포함되는 변수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 사실 "오늘 뭐 먹을래?"라는 질문 자체가 정말 상대가 뭘 먹고 싶은지 몰라서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자기 마음속에 이미 메뉴가 정해져 있고, 상대가 그 메뉴에 동의할지를 살짝 확인하는 과정이다.
질문은 겉으로는 선택을 요구하지만, 사실상 상대에게 선택의 책임을 슬쩍 넘기는 장치다. 그래서 나는 아무거나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미 '된장찌개 또는 카페 디저트'시나리오를 준비한다.
식사 후, 고기로 배를 채운 남편과 딸과는 달리, 나는 은밀히 내가 좋아하는 카페로 향한다. 그 앞에서, 그들의 시선과 관계없이, 맛있는 빵과 디저트를 한입씩 즐긴다. 고깃집에서 참았던 내 작은 욕망은, 카페의 달콤함으로 완벽하게 채워진다.
두 나라를 오가며 알게 된 건 이것이다. 어디서든 질문은 같지만, 대답의 방식만 다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무거나라고 말한다. 미국에서는 식전 빵이 있는 아무 식당이나 괜찮고, 한국에서는 최대한 눈치 보며 "아무거나."
그리고 된장찌개는 고깃집이 제일 맛있고, 김치와 깍두기는 국밥집이 최고며, 미국에 있는 웬만한 식당의 식전 빵이 맛있다. 맛있는 빵을 먹다 보면 배가 불러 시킨 음식은 자연스럽게 ‘내일 점심‘이 된다.
식전 빵과 된장찌개, 김치·깍두기, 나에게는 각 나라에서 작은 행복을 주는 고정 메뉴인 셈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말한다. 아무거나,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