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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견례 아니고 우정례

짧아도 깊은 인연의 법칙

by Susie 방글이




딸이 중학교 2학년 때 솔이라는 평생 친구를 만났다. 함께한 시간은 고작 9개월. 우리는 미국으로 떠났지만, 둘은 여전히 카톡으로 수다를 떨며 우정을 이어간다.


중2 때 책상에 앉아 스티커를 붙이며 깔깔대던 그 시간은 솔이가 미국에 두 번 찾아왔을 때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스티커로 가득한 노트와 웃음소리는 마치 시간을 뛰어넘는 마법 같았다. 마음이 먼저 알아본 인연이란 이런 것 아닐까.

시간보다 마음이 먼저였던, 그런 친구.

New Hope, PA (뉴호프, 펜실베니아) 희망이라는 이름 아래, 같은 방향으로 걷는 우리 셋
미국까지 와서 나뭇가지를 자르며 인생을 배우네, ㅎㅎ

이번에 남편과 함께 한국에 오면서 자연스레 솔이가 생각났다. 가볍게 밥이나 먹자고 연락했더니, 솔이 부모님도 함께 오신단다.


딸에게 카톡으로 소식을 전했다.

"솔이 엄마 아빠랑 밥 먹기로 했어."

그러자 딸의 답장은 단 한 줄.

"뭐야, 상견례야?!"

남편과 나는 서로를 쳐다보다 웃었다. 딸 특유의 익살스러운 목소리가 글자 속에서 그대로 들려오는 듯했다.

ㅎㅎㅎㅎ

약속 날, 갈빗집 문을 여니 고소한 냄새와 김이 가득했다. 솔이 엄마는 자리에 앉으시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고깃집인데 반찬이 참 맛있어요."

그 한마디에 우리도 함께 웃었고, 금세 분위기가 친근해졌다.


처음 만난 이들이었지만, 솔이를 통해 우리의 이야기가 이미 그들 마음에 닿아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 스스럼없이 서로를 챙겼다. 우리는 음식 사진을 찍고, 웃음소리가 들릴 것 같은 단체 셀카를 딸에게 보냈다.


"너 없이도 잘 논다~"라며 약을 올리자, 딸은 "와, 진짜 내가 없어도 이렇게 잘 논다고?"라며 웃는 이모티콘을 연달아 보냈다. 그 짧은 메시지에도 딸의 장난기와 애정이 묻어났다.

대화만큼 맛있었던 식사
딸을 향해 보내는 미소^^

시간이 흐르며 대화는 점점 깊어졌다. 처음엔 가벼운 일상 이야기로 웃음꽃이 피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앞으로 뭘 하며 살지 얘기가 나왔다. 결론은 간단했다.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자.

뚝배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듯, 우리의 대화도 점점 더 따뜻하고 깊어졌다.


문득, 우리가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갔을 때가 떠올랐다. 낯선 동네에서 만난 후덕하게 생긴 노부부가 이웃이 된 걸 환영한다며, 우리에게 손수 만든 쿠키를 전했다. 그 따뜻함은 낯선 동네에서의 외로움을 녹여주었다.


그때도, 솔이와 딸의 우정처럼, 그리고 오늘 솔이 부모님과의 만남처럼, 짧은 순간이 깊은 마음으로 남았다. 시간의 길이보다 마음의 깊이가 인연을 만든다. 이 진리는 비단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행 중 만난 낯선 이의미소, 길에서 나눈 짧은 대화, 심지어 카페에서 바리스타와 주고받은 농담조차도, 진심이 담기면 삶을 채우는 인연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솔이에게 밥 사주려 했던 그 가벼운 만남은 어느새 우리 모두를 이어주는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솔이가 '맛있는 식사 대접하고 싶었어요' 하며 쿨하게 계산하는 모습, 그리고 그 부모님의 따뜻한 미소가 가슴 깊이 새겨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 비가 조금씩 내리며 도시의 불빛이 차창 너머로 반짝였다. 젖은 거리에서 반사되는 불빛은 마치 우리의 만남처럼, 짧지만 강렬하게 빛났다. 딸과 솔이의 우정에서 시작된 이 만남이 또 다른 가족 같은 인연으로 피어났음을 깨달았다.

IMG_0267.jpeg 비에 젖은 불빛처럼, 스며든 인연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시간의 길이보다 마음의 깊이가 인연을 만든다. 이 단순한 진리는, 솔이와 딸의 우정뿐 아니라, 낯선 이웃의 쿠키, 솔이 부모님과 따뜻한 대화,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치는 수많은 순간들 속에서 되풀이된다. 그 마음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그리고 서로를 더 따뜻하게 채워준다.

부산 감천 마을

이 화려한 마을 풍경처럼, 여러 인연이 삶에 색감을 더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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