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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고 익는

관계의 맛

by Susie 방글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냉장고 속 음식처럼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그땐 미처 몰랐다.


퇴근 후, 회사 근처 펍의 문을 밀고 들어서면 따뜻한 조명과 맥주 거품 부글거리는 소리가 나를 맞는다. 동료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잔을 부딪히며 웃음이 터진다. "오늘 팀장님 어땠어?"로 시작된 이야기는 금세 지난 주말의 추억, 요즘 뜨는 드라마로 넘나 든다. 맥주 한 모금, 칵테일 한 모금에 근심이 살짝 멀어지는 기분이다. 밥과 술 한 잔, 카페에서의 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문자로 서로의 하루를 채우던 동료와의 시간. 그땐 영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회사를 떠나니, 냉장고 속 우유처럼 관계는 금세 시들었다. "언제 밥 한번"이라는 말이 몇 번 오가다, 이제 그녀의 소식은 인스타로만 확인한다. 신선했던 순간은 시큼한 기억이 되었다.


동료와의 관계가 시들 수는 있지만, 집에는 변하지 않는 소중한 꿀 같은 이들이 곁에 있음을 깨닫는다. 지치고 힘든 날, 소파에 앉아 딸과 남편과 드라마를 본다. 딸은 "인상 펴!" 하며 내 팔을 토닥이고, 남편은 말없이 빵을 내 앞에 놓는다. 이 따뜻함 앞에선 사르르 녹는다. 딸의 웃음소리와 남편의 묵묵한 배려는 내 인생의 꿀이다. 때론 굳어져도 따뜻한 말 한마디면 다시 달콤해진다.

내 약점을 늘 아는 남편 (집에서 만든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바스크치즈케이크)

통조림처럼 든든한 우정도 있다. 작년 겨울,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였다. 30년 지기 친구 S가 보낸 문자. "너 괜찮아? 내가 뭐 도울 거 없어?"바쁜 삶 속에서 연락은 뜸했지만, 늘 그 자리에서 힘이 되어주는 친구. 병원 복도에서 그 문자를 읽으며 눈물이 났다. 다음 날, S는 커피와 간식을 들고 찾아와 조용히 내 손을 잡아주었다. 오랜 세월묻어둬도 열어보면 맛이 살아 있는 관계다.


갓 구운 빵처럼 따뜻했던 날들도 있다. 대학 시절, 매일 밥을 먹고 영화를 보며 고민을 나누던 친구. 빵집 앞에서 수다 떨던 기억은 부드럽지만,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가며 연락이 끊겼다. 딱딱해진 빵처럼 멀어졌다. 가끔 그의 소식을 들으면, 그때의 부드러운 순간이 떠오른다. 다시 만나면 어떤 맛일까, 궁금하다.


된장 같은 인연도 있다. 처음엔 낯설고 강렬하다. 새로 들어오신 상사는 날카로운 지적과 무뚝뚝한 말투로 거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미국에선 야근이 드물어도, 가끔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는 날이면 함께 회사 근처 펍으로 향했다. 맥주 한 잔을 나누며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정이 쌓였다. 회의실에서 눈빛만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동료가 되었다. 된장처럼, 시간이 들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사람이었다.


라면처럼 속을 채워주는 순간도 있다. 작년 시카고 출장 때,부서 직원과 유명한 피자집에 들렀다. 사람이 많아 자리가 없던 그곳에서, 낯선 여자와 합석하게 됐다. 비 오는 저녁, 두툼한 딥디쉬 피자를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묻지 않았지만, 그날만큼은 낯선 도시에서 기대 쉴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출장길의 고단함이 라면 한 그릇처럼 든든히 채워졌다.


김치처럼 오래되고 깊은 인연이 있다. 미국에 계신 엄마는 내게 그런 존재다. 오늘, 엄마와 통화했다. 한국에 나와 있는 나를 향해 엄마는 "보고 싶다" 하시며 전화기 너머로 울먹이셨다. 그 소리에 내 마음도 뻐근해졌다. 엄마는 냉장고 구석의 신김치처럼, 때론 꺼내기 버겁지만 익숙한 존재다. 하지만 한 번 꺼내면 그 깊은 맛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김치처럼 세월을 먹을수록 깊어진다. 때론 짐 같고,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결국엔 가장 속을 채워주는 존재다. '이게 바로 내리사랑이구나.' 엄마의 마음이 내게 오고, 내 마음이 딸에게 간다. 김치 한 조각처럼, 그 맛은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세대를 이어가며 익어가는 사랑, 그 깊은 맛이 우리를 이어준다.


어떤 관계는 신선하고, 어떤 관계는 오래되어 더 진한 맛을낸다. 우유처럼 상하기도, 꿀처럼 오래도록 달콤하기도, 통조림처럼 든든하기도 한 인연들. 때론 라면처럼 짧지만 따뜻한 순간이 되고, 된장처럼 깊어지는 관계도 있다. 그리고 김치처럼, 엄마와의 인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린다. 이 모든 인연이 모여 내 삶을 채운다. 오늘, 나는그 안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마음을 달랜다.

냉장고 문을 열 때 어떤 맛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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