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뼈
한국에 머무는 동안, 내 미국 전화기는 와이파이가 있는 곳에서만 간신히 숨을 쉬었다. 카페, 식당, 지하철역을 벗어나면 핸드폰은 그저 카메라이자 시계일 뿐이었다.
특히 시골 마을 산속이나 드라이브 중에는 신호가 끊기며 완전한 자유가 찾아왔다. 처음엔 불편했다. 늘 울리던 알림, 메시지, 뉴스 속보가 사라지자 낯설고 어색했다.
며칠 전, 남편과 단둘이 시골 계곡에 있었다. 와이파이도 신호도 닿지 않는 그곳. 우리는 물가를 따라 걸으며 독특한 돌을 주웠다.
"이거 하트 같지 않아?"
"어디가? 이게 뭐야, 그냥 돌이네"
서로 돌을 보여주며 쓸데없는 농담을 나눴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 나뭇잎 사이로 부는 바람, 풀숲의 벌레 소리, 멀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핸드폰은 먹통이었다. 세상과 단절된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묘한 평온을 느꼈다. 그 순간, 소리의 겉모습이 아닌 그 안의 본질, 침묵의 울림을 듣고 있었다.
며칠 뒤, 기형도 시인을 소개하는 책을 읽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
이 구절은 계곡에서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시 속 김교수는 이 학설을 내세우며 한 학기 내내 침묵으로 수업을 이끈다. 학생들은 그의 침묵 속에서 말 너머의 진실을 찾으려 애쓴다.
이와 비슷하게, 존 케이지의 '4분 33초'가 떠올랐다. 이 작품에서 연주자는 4분 33초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지만, 관객은 사람들의 움직임, 심지어 숨소리까지 주변의 모든 소음을 음악으로 듣는다.
계곡의 고요는 바로 이와 같았다. 침묵은 소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는 무대였다.
나는 오랫동안 소음에 둘러싸여 살았다. 사람들의 대화, 도시의 차 소리, 끊임없는 알림음. 하지만 시골의 고요 속에서 바람, 물, 나뭇잎의 메아리에 귀 기울였다. 인위적이지 않은 침묵은 내 안의 오래된 아픔과 새로 싹튼 기대를 조용히 스치게 했다.
일상에서도 말의 본질을 놓칠 때가 많다. 얼마 전 남편과 나눈 대화에서 그의 말에 섣불리 반응했지만, 나중에 그의 지친 표정과 말 사이의 침묵을 떠올리며 진심을 깨달았다.
문자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동생의 짧은 'OK'는 처음엔 퉁명스럽게 느껴졌지만, 통화로 들은 느긋한 목소리에서 다정함을 찾았다. 말의 겉모습에만 머무르면 진실은 왜곡된다.
현대사회는 소음으로 넘친다. 소셜 미디어, 뉴스, 광고의 웅성거림이 우리를 에워싼다. 하지만 계곡의 고요 속에서 나는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 침묵은 나를 더 단단히 이어주었다.
앞으로 나는 그 조용한 울림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식탁 위에 남은 찻잔의 은은한 온기,
황혼 속에 머무는 짙은 구름의 무게,
잠 못 드는 밤의 고요 속에서 스며드는 오래된 기억들,
창문 틈으로 새어드는 새벽 공기의 서늘함,
그리고 오래된 책장을 넘기는 순간의 종이 냄새등을 간직하려 한다.
소음이 멈춘 순간, 우리는 소리의 뼈를, 침묵의 본질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네가 멈춘 자리엔, 시간이 고요히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