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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극장2」 -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읽었다옹

by 수상한호랑이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견딜 수 없다, 내가


안녕,

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하고

정말이에요,

라고 대답할 때


구불구불 휘어진 혀가

내 입천장에

매끄러운 이의 뒷면에

닿을 때

닿았다 떨어질 때



그러니까 내 말은,


안녕.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심이야.


  후회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 것도 믿고 있지 않아.



나에게

심장이 있다,

통증을 모르는

차가운 머리카락과 손톱들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에게 붉은 것이 있다, 라고

견디며 말한다

일 초마다 오므렸다 활짝 펼쳐지는 것,

일 초마다 한 주먹씩 더운 피를 뿜어내는 것이 있다



수년 전 접질렸던 발목에

새로 염증이 생겨

걸음마다 조용히 불탈 때가 있다


그보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다친 무릎이

마룻장처럼 삐걱일 때가 있다


그보다 더 오래전 으스러졌던 손목이

손가락 관절들이

다정하게

고통에 찬 말을 걸어온다



그러나 늦은 봄 어느 오후

검푸른 뢴트겐사진에 담긴 나는

그리 키가 크지 않는 해골


살갗이 없으니 물론 야위었고

역삼각형의 골반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엉치뼈 위의 디스크 하나가

초승달처럼 곱게, 조금 닳아 있다


썩지 않을,

영원히 멈춰 있는

섬세한 잔뼈들


뻥 뚫린 비강과 동공이

곰곰이 내 얼굴을 마주 본다

혀도 입술도 없이

어떤 붉은 것, 더운 것도 없이



몸속에 맑게 고였던 것들이

뙤약볕에 마르는 날이 간다

끈적끈적한 것

비통한 것까지

함께 바싹 말라 가벼워지는 날


겨우 따뜻한 내 육체를

메스로 가른다 해도

꿈틀거리는 무엇도 들여다볼 수 없을


다만 해가 있는 쪽을 향해 눈을 잠그고

주황색 허공에

생명, 생명이라고 써야 하는 날


혀가 없는 말이어서

지워지지도 않을 그 말을




2025.2.12. 아스라이 살갗을 스치던 괴로움조차 흐려져가는 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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