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교, 퇴학, 그리고 졸업
학교는 졸업한 학생을 징계할 수 없다. 일단 졸업하고 나면 더 이상 그 학교 학생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졸업생이 사회에 나가서 나쁜 짓을 했다 하여 학교가 그를 소환해 벌할 수는 없는 일이고, 설령 학생 시절에 한 나쁜 짓이 뒤늦게 밝혀졌다 한들 이제 그를 벌하는 일은 학교가 아니라 사회의 몫이다.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이 명제가 무려 '판례'까지 남기게 된 데는 장대한 히스토리가 있다[주1].
교수 감금 사건의 전말
총학생회 선거가 한창이던 2006년 4월 5일 100여 명의 학생들이 ㄱ대학교 본관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선거에 출마한 이 대학 4학년 A, B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총학생회 선거 방식을 둘러싸고 학생들과 학교 간에 의견 대립이 있었다고만 해두자[주2]. 학교당국은 선거 하루 전날인 4월 4일 ‘총학생회 선관위가 결정한 방식을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로 통보해 왔고, 학생들이 대화를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이에 학생들은 A4 한 장 분량의 ‘요구안’을 들고 본관 앞에 모인 것이었다.
학생들은 3층 회의실에 모여있는 처장 교수들(특히 학생처장)을 찾아가 ‘요구안’을 전달할 생각이었다. 처장단이 회의실 밖으로 나오자 학생들은 학생처장을 가로막으며 요구안 수령 및 대화를 요구했다. 학생처장은 '요구안' 수령을 거부했고 다른 처장들도 마찬가지였다.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그렇게 처장단은 본관 2~3층 계단 사이의 작은 공간에서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오도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 ‘감금’ 상태는 대략 오후 3시 반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이어졌다. 이후 학교 측이 발표한 ‘감금사태 일지’에 따르면 학생들은 처장들과의 면담을 약속받고 비로소 해산했다.
초유의 ‘출교’ 처분과 그 무효판결
졸지에 복도바닥에서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날밤을 샌 교수들은 충격이 컸을 것이다. 그냥 그 한장짜리 '요구안'을 받아들고 '읽어볼테니 돌아가라'고 했으면 적당히 끝났을텐데 그렇게까지 고집부릴 일이었나 싶긴 하다. 그러나 교수의 권위, 자존심,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는 투지 또는 오기 등 그들에겐 그들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학교가 발칵 뒤집히고 4월 17일 상벌위원회가 개최되었다.
A, B를 포함한 19명의 학생들이 출석 통보를 받고 진술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감금’ 당사자인 학생처장이 상벌위원회 위원장으로 와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으니 분위기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위원회는 학생들에게 ‘반성하고 있는지’ 등을 질문하며 예/아니오 형식으로 답변하도록 하고, 학생들이 서술식 답변을 시도할 경우 제지하였다.
상벌위원회는 A, B 등 7명에게 만장일치로 ‘출교’ 처분을 의결했다. 내칠 출(黜), 학교 교(校). ‘퇴학’보다도 한 단계 더 높은, 재입학도 원칙적으로 불허하는 최고 수위의 징계. 이 학교 내규에 ‘출교’ 조항이 생긴 이래 최초의 출교처분이었다.
짐작했겠지만 이들 7명은 출교처분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여 2007년 10월 4일 승소판결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징계혐의사유의 피해자는 징계위원회 구성에서 배제되어야 하는데 학생처장이 상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절차를 주재하고 의결권까지 행사한 점, ▲해당 학생들에게 실질적 해명기회나 진술할 기회를 부여하였다고 할 수 없는 점을 들어 해당 출교처분의 절차상 하자를 인정했다. 또한 이 학생들의 행위가 “중대하고도 심각한 징계처분 사유에 해당”한다고 하면서도 ‘출교’ 처분은 가혹하다고 하였다.
학교 측은 항소하였으나 곧 취하했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었다.
두 번째 징계, 두 번째 소송
출교무효판결이 나온 지 약 두달 뒤, 학교 측은 다시 상벌위원회를 열었다. 이번에는 감금 피해자들을 상벌위원회 구성에서 배제하고 학생들에게 진술 기회도 제대로 줬을 것이다.
상벌위원회는 학생들에게 공개 사과 또는 반성을 권고했으나, 반응은 냉랭했다. 학생들은 ‘사과와 반성은 이 사건 감금의 원인과 책임을 모두 학생들에게 돌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므로 일방적인 사과와 반성을 할 수 없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그냥 적당히 사과하고 끝낼 법도 한데, 이 학생들이나 그 처장 교수들이나 도통 적당히 끝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결국 2008년 2월 15일 두 번째 징계처분이 내려졌다. 이번에는 ‘퇴학’ 처분이었다.
이쯤 했으면 법원도 이젠 학교 손을 들어주지 않을까, 라고 학교 관계자들은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도 학생들의 퇴학처분 무효확인 청구가 인용됐다. 1심 재판부는 이번에도 학생들의 잘못은 인정하되, “학생의 지위를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징계처분의 경우 학생의 교육받을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그 학생을 계속 재학하게 하는 것이 그 학교의 교육목적에 반한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인정되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용된다.”라고 하며 퇴학처분은 과도하다고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은 흘러 A와 B는 ㄱ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下편에 계속..)
[주1] 같은 학생들에 대하여 무려 여덟 번의 판결이 있었는데, 그중 서울중앙지방법원 2006가합64837, 서울중앙지방법원 2008가합18395, 서울중앙지방법원 2009가합65947, 서울중앙지방법원 2010가합10037, 서울고등법원 2011나46472, 대법원 2012다62554 판결문을 기초로 재구성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처음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주2] 당시 ㄱ대학교 병설 전문대학 한 곳이 ㄱ대학으로 통폐합되면서, 통폐합 이전의 병설 전문대 재학생들도 ㄱ대학교 캠퍼스로 이사 와서 함께 지내게 된 상태였다. ㄱ대학교 총학생회 선관위는 이 병설 전문대 재학생들도 총학생회 선거 투표권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ㄱ대학교 학생이 아니므로 학교 당국은 반대했다. 역시나, 그때는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