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의 천국 - 청계산

-몸과 마음의 힘을 빼는 일-

by 수다쟁이


새해를 맞아 남편과 아이와 함께 청계산을 올랐다. 특별한 목적 없이 답답한 집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내디딘 발걸음이었다.

한두 시간이면 가볍게 바람을 쐬고

돌아오겠지 하고 나섰던 청계산은

집콕만 하고 있던 나에게는 그리

만만한 산은 아니었다.

아니 산이라고 하기에 너무 잘 닦여진

계단이 살짝 실망스럽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물만 한병 들고 올랐던

청계산은 천국의 계단이 아니라

계단의 천국이었다.

야심 차게 시작한 빠른 발걸음이

이십 분쯤 지났을까?

아이와 나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얼굴이 시뻘게져서 가다 쉬다를

몇 번 반복했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계단은

내 다리를 남의 다리로 만드는

지옥의 계단처럼 느껴졌다.


잠시 숨을 고르다

문득 그냥 되돌아갈까를 고민했다.

'무슨 산이 이렇게 다 계단이야!'

'재미가 하나도 없네..'

애꿎은 계단 타령만 늘어놓으며

투덜투덜 혼잣말을 뱉어냈다.



저 계단을 계속 오를 것인가?

아님 중간에 내려갈 것인가? 내디뎌지지 않는 허벅지를 부여잡고 한참 동안 서성이며

마음과 대화를 나눴다.


'아! 아이한테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이 스쳐갔고,

다른 사람들은 일상처럼 오르는 산인데

포기라는 말을 내뱉기가 조금 멋쩍고 뻘쭘했다.

그리고 그냥 돌아가면 답답하게 억눌린 마음이

더 불편하게 꼬여서 돌아갈 거 같았다.


그래!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최선이야!

산을 오르는 이유가 그런 것처럼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질수록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발걸음에 집중할수록 복잡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비워질 거 같았다.


생각을 떨쳐내고

가뿐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턱까지 차오르던 숨이 한결 나아지고

어깨와 다리에 들어간 힘이

조금은 빠졌다.

그리고 천천히 가볍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살다 보면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아이를 키우면서도,

또 어떤 일을 하면서도,

급하게 마음을 먹고

완성된 결과를 빨리 보려고 서두르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 고조되고

흥분되어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몸에 힘이 들어가면

어느 순간에 금방 지치고,

일은 어영부영 뒤로 미뤄지다 나중에는 흐지부지

포기하게 돼버리는 걸 나는 안다.


쉽게 친해지는 친구는 쉽게 어긋나고

쉽게 상처를 주는 걸 알면서도

느리게 천천히 가는 법을

자꾸 까먹게 된다.


아이를 키우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약속된 대답이 없는

기다림과의 싸움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 조급해진다.

그럴 땐 몸에 들어간 힘을 빼야 할 타이밍이다.




몸에 들어간 힘을 빼자

다리가 가볍고 호흡이 한결 편안해졌다.

가다가 힘이 들 때는 한참을 서서 경치 구경도 하고

중간중간 물도 마시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젊은 청년들,

얼마 남지 않은 대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유치원생 아이와 씩씩하게 계단을 오르는

아빠의 모습,

고맙게도 힘드냐며 물을 건네주려는

다정하신 할아버지의 선한 마음이

힘든 산행에 여유를 갖게 했다.



돌문 바위를 지날 때쯤

나와 딸의 발걸음은 아무렇지 않게 가벼워졌다.

여유가 생기니 지옥 같았던 계단도 원망스럽지

않았다.

저 바위를 세 바퀴 돌며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에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

두 손을 모아 새해 소원을 빌었다.

발걸음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던 짐도

한 덩이 덜어낸 것처럼 가벼워졌다.



매바위까지 오르자 기분은 날아갈 것처럼

상쾌했다. 산이 더 높다 해도 어디까지라도

올라갈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드디어

산의 정상에 올랐다.

엄청 큰 성취감은 아니지만 작은 뿌듯함이

함께했다.

답답했던 마음에도 작은 창문을 하나

낸 것처럼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마도 포기했더라면

나는 산을 오르며 몸에 들어간 힘을

빼는 방법을 기억해내지 못할 뻔했다.

그리고 청계산의 계단을 원망했겠지?


계단의 천국에서 만난 뜻밖의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