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것은 원자입니다
[엠페도클레스 등장]
(엠페도클레스) 잘 왔다. 너희들이 나를 만난 건 행운이다. 나는 한때 소년이었고, 소녀였으며, 덤불이었고, 새였고, 물고기였다가, 사자와 월계수로도 태어났지만, 이제 신으로 태어날 자다.
파르메니데스가 ‘있음’은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고, 나눠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고 한 주장은 일리가 있다. 존재는 분명 영원한 것이니. 그러나 그 이론은 수정이 필요하다. 존재는 하나가 아니라 넷이기 때문이다. 불, 물, 공기, 흙이라는 근원적인 물질들이 모여 세계를 이룬다.
(필로) 4원소설?!
(엠페도클레스) 그렇다. 이 네 원소가 파르메니데스가 설명한 일자를 대신해야 한다. 이것들이 모든 존재하는 것의 ‘뿌리들’이다. 그리고 이 뿌리들의 ‘혼합’과 ‘분리’로 인해 다양한 사물들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데오) 불, 물, 공기, 흙은 생성 또는 소멸하지 않고, 나눠지지 않고, 영원한데 그것들이 섞여서 다양한 사물들이 된다는 건가요?
(엠페도클레스) 그렇다. 이 세상에는 불, 물, 공기, 흙을 움직이게 만드는 신성한 힘이 있다. 네 원소를 혼합시키는 힘은 ‘사랑’이다. 이들을 혼합한다고 해서 불, 물, 공기, 흙의 성질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반면에 이들을 분리시키는 힘은 ‘불화’다. 불, 물, 공기, 흙 스스로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사랑과 불화의 힘이 이들을 움직이게 한다. 네 원소가 결합하거나 분리되어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무들, 새들, 짐승들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랑의 힘이 네 원소를 결합하거나, 불화의 힘이 결합한 것을 분리하여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 사랑과 불화의 힘은 온 우주를 지배한다. 사랑의 힘이 강해져서 사랑이 우주를 지배하면 우주는 사랑의 구(球)가 되고, 불화의 힘이 강해져서 불화가 우주를 지배하면 우주는 불, 물, 공기, 흙으로 완전히 나눠진다. 지금 우리가 사는 우주는 사랑의 지배가 끝나고 불화의 힘이 강해져서 두 힘이 공존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후에는 불화의 힘이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사랑의 힘이 커져 사랑이 지배하고, 그리고 다시 불화의 힘이 지배하고, 이렇게 우주는 두 힘의 지배가 영원히 반복된다. 인간은 그 안에서 식물, 동물, 인간 그리고 다이몬(δαίμων)으로 윤회를 겪는다.
그렇다. 그러니 너희들은 다섯 개의 샘에서 물을 퍼내 씻고, 악을 멀리하고, 신적인 정신에 이르도록 노력할 것이다.
[엠페도클레스 퇴장]
(소피) 말투가 꼭 영험한 무당이 신내림을 받아 점괘를 봐주는 것 같네요. 으스스해서 소름이 돋았는데…. 파르메니데스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일단 두 분을 더 만난 후에 소감을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아낙사고라스와 데모크리토스 두 분 모두 고향을 떠나 그리스의 아테네에 머물고 있다고 하니 그쪽으로 가죠.
[아낙사고라스 등장]
(아낙사고라스)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무엇인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태초에는 모든 것이 함께 있었습니다. 어떤 것도 구별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요. ‘질료’ 덩어리라고 할 수 있죠.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섞여 있었습니다. 모든 것 안에 섞여 있는 모든 것, 그것이 만물의 ‘씨앗’입니다.
온갖 종류의 모양, 색깔, 맛을 가지고 있는 씨앗입니다. 축축한 것의 씨앗, 건조한 것의 씨앗, 뜨거운 것의 씨앗, 차가운 것의 씨앗, 밝은 것의 씨앗, 어두운 것의 씨앗, 흰색의 씨앗, 검은색의 씨앗이 모두 섞여 있는 것입니다.
(소피) 씨앗이, 꼭,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했던 ‘아페이론’과 비슷해 보여요.
(아낙사고라스) 비슷하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렇지만 아낙시만드로스가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을 나는 이야기합니다. 질료 덩어리를 분리하는 힘은 질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질료를 분리하는 힘은 ‘지성’(nous)입니다. 우주에는 질료와 지성이 있습니다. 지성은 회오리처럼 소용돌이를 일으켜 질료 덩어리를 분리하고 질료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필로) 소용돌이요?
(아낙사고라스) 그렇습니다. 이 소용돌이 때문에 태양과 달과 별은 회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운동은 무작위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지성이 질료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질서 있게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죠. 지성이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인간이 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우주적 지성 덕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성도 질료들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질료 덩어리가 지성에 의해 분리되면 질료는 축축한 것이 되거나 건조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뜨거운 것이나 차가운 것, 밝은 것이나 어두운 것이 됩니다.
(소피) 지성이 모든 것을 질서 있게 만든다면, 씨앗은 왜 필요하죠?
(아낙사고라스) 가령, 흰 눈은 흰색의 씨앗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흰색입니다. 거기에는 검은색의 씨앗도 있습니다. 다른 씨앗들도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지성에 의해 흰색 씨앗이 눈 속에 더 많아졌기 때문에 눈이 흰색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질료는 모든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지성은 그중에서 어떤 씨앗은 많이 남아 있게 하고, 어떤 씨앗은 적게 남아 있게 합니다.
[아낙사고라스 퇴장]
(필로) 질료와 지성을 구별해서 생각한 게 독특하네요. 지성은 정신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네, 맞습니다. 아낙사고라스는 세계를 설명할 때 물질과 정신을 구별한 최초의 철학자입니다. 이런 생각은 이후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물질과 정신을 구별해 생각할 것이냐 아니냐가 철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필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해야 하나요? 모든 게 물질 아닌가요?
(소피) 아니죠. 정신은 물질과 구별되잖아요. 이 세상은 물질만 있는 게 아니에요. 정신적인 것이 분명히 존재해요.
(필로)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소피) 그거야 우리가 생각을 하잖아요. 생각이 정신 아닌가요?
(필로) 우리가 생각을 한다고 해도 그게 이 세계에 정신적인 것이 있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데오) 저도 아낙사고라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게 물질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왠지 섭섭할 것 같긴 해요. 이 세상에 물질과 구별된 정신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자, 이제 조금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철학자를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 게 좋을지는 계속 고민해봅시다. 많은 철학자가 오랜 시간 여러분과 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을 들으면서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선 데모크리토스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데모크리토스, 부탁합니다.
[데모크리토스 등장]
(데모크리토스) 여러분의 흥미로운 대화에 낄 수 있어 영광입니다. 나는 우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주는 실제로 ‘원자’(ἄτομος)와 ‘허공’(κενο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원자이고, 존재하지 않은 것이 허공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가 하나라고 얘기했으나, 아닙니다. 존재는 여럿입니다. 원자들이지요.
파르메니데스는 있지 않은 것은 없다고 했지만 있지 않은 것은, 그렇습니다, 있지 않은 것은 반드시 있습니다. 허공, 비어있는 공간 말입니다. 빈 공간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빈 공간이 없다면 움직임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들, 그렇습니다, 있는 것들이란 원자들이죠, 그렇습니다,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원자들이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무수히 많은 원자가 허공 속에서 끝없이 움직여서 다양한 사물들이 생겨났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운동을 부정했지만, 운동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원자들은 허공 속에서 운동합니다.
(필로) 과학 시간에 배운 그 ‘원자’라는 생각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거네요.
(데모크리토스) 생각, 그렇습니다. 생각도 원자에 의해 생기는 것입니다. 원자들이 모여서 생긴 어떤 사물의 상(象)이 눈의 원자들과 접촉하는 게 감각입니다. 사고는 감각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고는 항상 감각한 것에 대한 사고입니다.
사고는 영혼의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영혼은 원자들의 덩어리입니다. 영혼이 평온한 상태란 원자들이 안정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혼의 안정된 상태란 유쾌함, 평정, 무탈함, 즐거움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즐겁고 유쾌한 마음으로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까? 마음의 평정을 이루고 있습니까? 그러길 빌겠습니다.
[데모크리토스 퇴장]
(필로) 이건, 모든 게 물질이라는 이야기잖아요!
네, 맞습니다. 모든 게 물질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을 유물론(唯物論)이라고 부릅니다.
(소피) 유쾌하게 살라는 얘기는 무척 와닿았어요. 하지만 저는 유물론은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데오) 저는 데모크리토스를 보면서 과학자들을 떠올렸어요.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이 후대의 과학자들에게 깊이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겠죠.
좋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더 나눠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여행을 포함해 지금까지 만났던 철학자들을 다시 떠올려볼까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제논 그리고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 이들을 보통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혹은 ‘자연철학자’라고 부릅니다.
그럼, 여러분은 지금까지 만난 철학자 중 누가 가장 마음에 드나요? 이유는 뭘까요? 가장 마음에 들지 않은 철학자는요? 그 이유도 말씀해주세요. 몹시 궁금하군요.
(소피) 마음에 드는 철학자는 아낙시만드로스와 헤라클레이토스예요.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 개념이 심오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고요.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모든 것이 변한다는 이야기도 심오했어요. 제가 심오한 사람을 좀 좋아한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철학자는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이 첫 번째고요.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데오) 저는 데모크리토스가 마음에 들었어요. 철학이 점점 발전한다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가장 마지막에 만난 데모크리토스의 이야기가 가장 납득이 잘 됐어요. 저 역시 헤라클레이토스는 인상적이었어요.
마음에 들지 않은 철학자는 밀레토스학파와 피타고라스요. 둘 다 딱딱한 철학을 했던 것 같아요.
(필로) 저는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그래도 한 사람만 꼽으라면 피타고라스입니다. 세계의 근원으로 수를 떠올렸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인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철학자는 두 분과 다르네요.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좋습니다. 우리의 생각 여행은 당분간 아테네를 벗어나지 않을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만났던 철학자와는 사뭇 다른 생각을 펼치는 철학자들이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가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