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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숫제 Feb 13. 2024

파르메니데스와 제논

하나가 존재할 뿐입니다


(소피) 선생님, 오늘도 저희에게 말을 시킬 건가요? 철학자를 만난 이후엔 꼭 그 철학자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닌지 소감을 이야기하래서, 하긴 하는데, 저희 말이 정답도 아니고 쓸데없는 얘기만 하는 것 같아서 민망하거든요.     


(필로)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제 생각을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좋은데, 영양가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아서 듣는 분들에게 좀 죄송하더라고요.     


아닙니다. 세 분 말씀이 꼭 필요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철학에서 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대화 없이 철학을 하는 것은 물속에 들어가지 않고 수영을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나눈 대화가 역사에 남을 통찰이나 놀랍고 빛나는 사상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자의 말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 됩니다.     


생각을 표현하는 일이 철학입니다. 철학을 배우는 일은 자기 생각을 자기 말로 표현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철학자의 말솜씨에 위축되지 말고 친구와 대화하듯 마음 편히 대화를 즐기십시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금씩 깊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자, 그럼, 오늘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와 그의 제자 제논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이탈리아 서부 해안의 작은 도시 아셰아입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출생지인 고대 그리스의 도시 엘레아가 있던 곳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당시 그 지역 헌법을 제정할 정도로 사회적으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철학의 역사상 처음으로 존재에 관한 논증을 세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전 철학자들도 존재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펼쳤지만, 파르메니데스는 논리적인 근거와 이유를 들어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근거와 이유를 대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을 논증이라고 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고령의 나이로 아테네에 가서 젊은 소크라테스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그의 지혜에 깊은 감명을 받기도 합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은 자신의 스승을 열렬히 옹호하기 위해 ‘제논의 역설’을 만듭니다.     


[파르메니데스와 제논 등장]

(파르메니데스) 나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딸들의 호위를 받으며 아주 명민한 암말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곧 커다란 문 앞에 당도했지요. 그 문을 정의의 여신 디케(δίκη)가 지키고 있었는데, 마차를 호위하던 태양의 딸들이 디케에게 가서 알 수 없는 말을 하니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문을 지나 나는 여신을 만났습니다. 여신은 나에게 말했습니다.      


“잘 왔다. 그대는 진리와 의견의 차이를 배우게 될 것이다.” 나는 여신의 말을 명심하겠노라 다짐했습니다. “탐구의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있음’의 길이다. 이 길은 진리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없음’의 길이다. 이 길은 전혀 배움이 없는 길이다. ‘있음’의 길만 탐구와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없음’의 길이 아니라 ‘있음’의 길을 가야 한다. 이 길만이 확고한 앎의 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났던 철학자들의 이야기, 세계를 여럿(다자)으로 상정하거나 변화한다고 보는 것은 모두 진리의 길이 아닙니다.     


Robert H Niesse, Philosophy, Parmenides, Way to Truth, Painting, 190x140, 2020.


(데오) 세계가 다자가 아니고 변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세계는 무엇인가요?     


(파르메니데스) 세계는 하나(일자)입니다. 하나(일자)가 존재할 뿐입니다.     


(데오) 세계가 하나라니요. 그게 무슨...     


(파르메니데스) 내가 만난 여신의 이야기부터 정리를 좀 해보지요. 여신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선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유니콘은 존재하지 않지요. 그런데 누가 만약 유니콘이 존재하는 것처럼 유니콘에 관해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혹은, 유니콘에 관해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유니콘이 있는 것처럼 상정해두고 이야기를 한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그 사람의 이야기가 틀렸다고 하겠지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다루었으니까요.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거나 상정해두면 안 됩니다.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면 배움의 길을 걸을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만나기 전, 여러분이 만났던 철학자들은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계를 여럿(다자)로 여기면서 하나(일자)의 아르케를 찾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럿(다자)를 표현하기 위해 수를 이용해야 한다고도 주장했습니다.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주장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만난 여신이 알려준 진리의 길을 가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있음’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외 없이 ‘없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자신이 간 길이 비진리의 길인 줄도 모르고 걸어간 겁니다. 그러니 그들의 생각은 하나의 ‘의견’일 뿐입니다. 나는 그들의 의견을 ‘근거가 없는 말’을 뜻하는 ‘억견’ 혹은 ‘속견’이라고 부릅니다. 의견은 의견일 뿐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로) 이전 철학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한 적이 있었나요?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지요. 그는 모든 것이 변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변화는 유니콘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한 잘못된 사례입니다.     


자, 변화가 무엇입니까? 어떤 A가 B로 변화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이때 A는 존재했다가 존재하지 않게 되며, B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존재하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변했다고 해봅시다.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했던 어린아이가 존재하지 않게 되고, 존재하지 않았던 어른이 존재하게 됩니다. A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 B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 어린아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 어른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상정한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한 겁니다.     


그러니까 ‘변화’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기에 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없음’의 길을 걷는 일이 됩니다. 생성이나 소멸도 없습니다. 진리의 길을 걸으십시오. 진리의 길은 변화를 거부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일자가 존재한다. 이것이 진리의 길입니다.     


(소피) 이게 무슨 말이죠?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잖아요. 상식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이야기인데요. 저는 파르메니데스가 하는 이야기가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면서 확인하고 있는 이 변화는 뭐란 말이에요?      


(제논) 우리가 목격하는 변화는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이 ‘현상’을 볼 뿐이에요. 파르메니데스 선생님 말씀처럼 ‘실재’의 세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눈과 귀 같은 감각 기관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아주 작은 씨앗 하나를 바닥에 떨어트려 보세요. 씨앗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나요? 안 들리죠? 그런데 씨앗 한 말을 떨어트려 보세요. 커다란 소리가 납니다. 씨앗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소리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있지만 우리가 듣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 감각을 믿지 말고, 생각을 하세요.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과 현상 너머 실제의 세계인 ‘실재’를 구별해야 한다는 말씀이죠?

     

COLOR OF REALITY (출처: https://www.alexameade.com/color-of-reality)


(파르메니데스) 그렇습니다. 현상은 환상일 뿐입니다. 변화에 관해선 이야기했으니, 이번에는 세계가 여럿(다자)이라는 주장에 관해 이야기해보지요. 그들의 이야기에도 ‘없음’의 길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여럿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감각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리에 있고 나는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과 나는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세계을 여럿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분리가 없다면 세계가 여럿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세계가 여럿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음’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 나는 없고 내가 있는 자리에 여러분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상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셨습니까?     


이들의 주장 이면에 ‘없음’의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까? 분리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세계가 여럿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진리가 아닌 의견의 길을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음’의 길을 가기 위해 우리는 분리 자체를 버려야만 합니다. 분리를 버리면 존재와 존재 사이에 틈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존재로, 다시 말해 일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존재는 분리되지도 구별되지도 나뉘지도 않는 하나(일자)입니다.     


(소피)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필로) 알 듯하면서도 어렵네요.   

  

(데오) 변화나 분리가 있어야 세계가 여럿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변화나 분리는 ‘없음’을 있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틀렸고, 그래서 세계는 다자(여럿)이 아니라 일자(하나)라는 이야기인가요?    

 

(필로) 그러게요. 그런 것 같네요.     


(소피)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제가 볼 땐 너무 터무니없네요. 세계가 변하는 건 너무 분명하잖아요.     


(제논) 변화가 분명하다고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내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내 이야기는 세계가 여럿(다자)이라고주장하는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우스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지 보여줄 겁니다.

    

‘귀류법’을 사용하겠다는 거죠?   

  

(제논) 그렇지요.     


(필로) 귀류법이 뭔가요?    

 

귀류법은 상대방의 주장이 참이라고 가정한 후, 거기서부터 모순을 끌어내 그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방법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논은 세계가 여럿이고, 변화한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의 주장이 참이라고 가정한 후에, 거기서부터 모순을 끌어내어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겠노라 말하는 것입니다.  

    

(필로) 아, 스승 파르메니데스의 이야기가 맞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거네요.     


(제논) 그렇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우선 세계가 여럿으로 되어 있는 게 참이라고 해봅시다. 그럼 세계에는 사물들이 있겠지요. 그중 한 사물은 크기를 가질 것이고 크기를 가진 사물은 잘게 쪼갤 수 있습니다. 무한히 잘게 쪼갠다고 해봅시다.     


무한히 잘게 쪼개도 각각의 조각들은 여전히 크기를 갖겠지요? 크기를 갖지 않을 수도 있을까요? 일단 크기를 가진다고 해봅시다. 이렇게 무한히 잘게 쪼개진 크기를 갖는 아주 작은 조각들을 모으면 어떻게 됩니까? 무한히 잘게 쪼갰으니까 크기를 가진 조각들이 무한히 많을 겁니다. 그러면 그 조각들을 다 모으면 무한히 큰 사물이 될 테고요. 그러면 이 세계에는 무한히 큰 사물들이 있다고 해야 할 거예요. 말이 안 되지요.    

 

만약 무한히 잘게 쪼갰더니 쪼개진 각각의 조각들이 크기를 갖지 않는다면 더 큰 일입니다. 왜냐하면, 크기를 갖지 않는 것을 모아서 크기를 갖는 걸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각 사물은 아무런 크기를 갖지 않은, 즉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니까요.     


(데오) 말씀하신 것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이든 하려면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제논) 잠시 시간을 드릴 테니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필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드는데요.     


(제논) 이제 세계가 변화하는 게 맞다고 해봅시다. 세계가 변한다면 운동이란 게 있을 겁니다. 운동이란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운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겁니다. 그런데 운동은 당연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운동은 요상한 겁니다. 제가 네 가지로 예를 들어보지요.     


Richard Artschwager,  Zeno's Paradox, Etching with aquatint,  19 × 22 in | 48.3 × 55.9 cm, 2004


먼저, 당신들의 다음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곧 어딘가로 가겠지요? 목적지를 향해 움직여야 할 겁니다. 그런데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당신들은 반드시 중간 지점을 지나야 할 겁니다. 중간 지점을 지나지 않고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리고 그 중간 지점에서 또 한 번 목적지까지의 중간 지점을 지나야 할 겁니다. 또다시 그 지점에서 목적지까지의 중간 지점을 지나야겠지요. 이렇게 계속 중간 지점을 무한히 지날 수 있습니다. 무한히 많은 중간 지점을 지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요?     


(필로) 무한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네요.

     

(제논) 그럼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겠지요? 운동이란 게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결론을 만들어냅니다. 세계가 여럿이라고 주장하는 작자들은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아요.     


또 다른 예를 들어보지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아켈레우스는 흐르는 강물보다 빠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킬레우스는 앞서 있는 거북이를 결코 앞지를 수 없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언제나 앞서 있는 거북이가 있던 곳에 도착해야 하고, 그동안 거북이는 조금이라도 앞으로 가게 되고, 또 아킬레우스는 거북이가 있던 곳에 도착하는 동안 거북이는 조금이라도 앞으로 가게 됩니다. 즉, 아킬레우스는 늘 거북이가 있던 곳에 도착해야 하며 거북이는 늘 그동안 조금이라도 앞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니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앞지를 방법은 없습니다.     


(소피) 허, 참. 황당하네요.  

   

(제논) 내 말이 그겁니다. 세계가 변화한다는 주장은 황당한 이론입니다.  

   

(소피) 그렇지만 실제로는 앞지르잖아요.     


(제논) 쫓아가거나 앞지르는 건 모두 현상일 뿐입니다. 변화는 실재가 아니에요. 변화가 실재라면 어떻게 이토록 황당한 이야기가 생길 수 있단 말입니까. 실상 세계는 하나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화살을 쏜다고 해보지요. 그럼 화살은 공중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까요?     


(데오) 차지하고 있겠죠.  

   

(제논) 그럼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화살은 움직이고 있는 건가요? 정지해 있는 건가요?   

   

(데오)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면 정지해 있는 거겠죠.     


(제논) 그렇다면 화살을 정지하면서 날아가고 있겠군요.     


(필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네요.    

 

(제논) 내 말이 그 말입니다. 변화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도 그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작자를 사람들이 좋아하니 어찌 내가 답답하지 않겠어요.


이제 마지막입니다. 똑같이 생긴 네 칸짜리 열차가 세 대 있다고 해봅시다. A열차는 가만히 서 있습니다. B열차는 가만히 서 있는 A열차의 중간 지점에서 열차의 맨뒤로, C열차는 가만히 서 있는 A열차의 중간지점에 열차의 맨앞으로 이동한다고 합시다. B열차는 A열차의 두 칸을 지났을 것이고, C열차도 A열차의 두 칸을 지났을 겁니다. 그런데 같은 시간 동안 B와 C열차는 서로 네 칸을 지났습니다. 두 칸과 네 칸이 같은 것인가요?


(필로) 같지 않죠.   

  

(제논) 그런데 왜 같은 시간 동안 두 칸 움직이기도 하고, 네 칸 움직이기도 하는 겁니까? 혹시 절반의 시간이 두 배의 시간과 같아서 그런 걸까요?     


결론은 이겁니다. 변화란 이렇게 세상을 엉뚱하게 보게 만든다는 겁니다. 파르메니데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변화란 현상일 뿐이고 환상일 뿐입니다. 세계가 여럿으로 되어 있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로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파르메니데스와 제논 퇴장]     


(필로) 이게 ‘제논의 역설’이군요.    


Pellegrino Tibaldi, Zeno of Elea, 1588~1595.(Zeno of Elea shows Youths the Doors to Truth and False)

 

(소피)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말하는 사람들이라니. 동의하기 어렵네요. 파르메니데스도 그렇고 제논도 그렇고 억지 논리로 우겨서 저를 속이려는 사람처럼 보여요. 이 사람들이 철학자 맞나요? 사기꾼 아닌가요? 사기꾼 같아요. 저는 세계는 변한다고 이야기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틀린 것 같아요.


(데오) 저는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들을 반박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제논의 이야기를 반박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이건 아닌 것 같아, 하는 느낌이 드는데 적절하게 말로 표현을 못 하겠어요. 반박을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동의해야 할 것 같달까요. 누군가가 반박을 해주면 고마울 심정이에요.    

 

(필로) 저는 놀랐습니다. 압도감 같은 걸 느꼈다고 할까요. 모든 이야기가 명료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이게 추론이고 논증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도 처음에는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어렵다는 걸 깨닫자마자 무언가 심오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느낌이에요. 아직은 뭐라고 더 말을 이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애쓰셨습니다.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이야기는 비교적 어려운 편에 속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실재를 이성을 통해 도달하려는 시도이니까요. 세계가 여럿이라는 주장을 논박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는 여럿이지만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는 실재의 세계는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동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점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들이 실재(實在, reality)와 현상(現象, Phenomenon)을 구분해서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우리 앞에 나타나는 세계가 있고 그것과 구별되는, 사유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실재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고민해볼 문제는 세계를 실재와 현상으로 구별할 수 있느냐 혹은 구별해야 하느냐, 아니면 구별할 수 없고 또 구별하면 안 되느냐 입니다.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가 존재할까요? 아니면 보이는 게 전부일까요?    

  

여러분들처럼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다음에 만날 세 철학자가 그들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파르메니데스의 이야기를 각색하면서 이전의 철학자들을 조율했을지 예상해보면서 다음 여행지로 가면 좋겠습니다. 우선 영화 ‘대부’의 주인공 비토 콜레오네(말론 브란도)의 고향으로 등장하는 이탈리아의 섬 시칠리아로 갑시다. 시칠리아의 남부 해안에 있는 도시 아그리젠토는 고대 도시 아크라가스가 있었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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