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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타일 Jan 11. 2024

무수리의 하루

집에 온 너는 온 집안을 킁킁대며 기어 다녔어.

'나이도 많고, 걷지도 못하니 얌전하겠지'

나는 네가 오래 살지 못할 줄 알았어.

뿌연 회색 눈, 잦은 기침, 피부 곳곳에 짓물러서 생긴 딱지.

나는 그저 너의 마지막이 비좁은 케이지보다 조금 큰 내 원룸이 편할 거 같아서 데려왔어.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더라.


너는 추호도 잠시 내 집에 머물다 갈 생각이 없었어.

생각보다 똑똑한 너는 이제 집에 온 걸 알고, 이미 내가 다 잡은 물고기란 걸 알고 사고를 치기 시작했어.

케이지에서 몰랐는데, 넌 바닥을 기어 다니며 오줌을 쌌고, 내 옷 위에도 오줌을 쌌어.



게다가 자기보다 내가 서열이 낮다고 생각했는지 그때부터 날 종 부리듯 부리더라.

너는 아침에 제일 먼저 주방으로 나와 짖기 시작했어.

잠이 덜 깬 나는 어서 네게 밥을 주고 침대로 다시 돌아갔지만, 침대에 누운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너는 어느새 밥을 다 먹고 침대로 따라와 짖었어.

이번에는 산책하러 가자는 신호야.

시츄가 고집이 세다더니 너도 한 고집하잖아.

한번 짖으면 산책하러 갈 때까지 짖는 너잖아.

결국 나는 옷을 대충 챙겨 입은 뒤, 너를 안고 산책하러 가.

고상하게 품에 안겨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너는 코를 킁킁거리며 열심히 바깥 냄새를 맡아.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눈곱 낀 누추한 얼굴로 네가 다양한 냄새를 맡도록 천천히 걸어.



산책이 끝나고 집에 오면 너는 또 짖었어. 휴….

이번에는 똥이야.

밥 먹고 산책도 하셨으니 얼마나 소화가 잘되시겠어….

혼자 배변을 못 하는 너는 오줌이 마려워도 내게 호통치듯 짖어.

네 배를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그럼, 쾌변 완료!

대소변이 끝나고 네 목욕이 끝나면 이제 나도 한숨 돌릴 차례.




이제 다시 자기는 글렀고 나도 아침을 준비해.

내가 식탁에 앉으면 너는 또 앞다리를 흔들며 반짝이는 눈으로 내게 다가왔어.

마치 "뭐 먹어? 식탁 위에 뭐야? 내놔"라고 말할 거 같은 표정으로.

"미남아. 나도 입에 뭘 좀 넣자. 짖으면 안 돼."

하지만 소용없어. 넌 계속 짖잖아. 결국 간식으로 타협한 뒤, 나도 밥을 먹을 수 있어.

너는 원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 내게 호통치듯 짖었어.

특히 내가 주방에 서 있기만 해도 너는 뭐라도 내놓으라고 호통쳤어.

네 호통 덕분에 난 여러 가지 능력이 생겼어.

부스럭거리는 과자를 소리 없이 뜯기, 소시지를 한입에 넣고 원래 없던 척하기.


게다가 네가 모르게 외출하는 법도 터득했어.

우선 나를 따라 나온 네게 멀리 간식을 던져.

그리고 네가 간식으로 가는 동안 후다닥 뛰어나가는 거야.

급할 때는 신발을 들고 나와 현관 밖에서 신기도 해.

살면서 누구 눈치를 이렇게 살핀 적이 있나 싶어.




이제 활발하다 못해 건방진 너를 보면 처음 병원에서 본 주눅 든 네가 맞는지 의심이 들어.

그래. 어쩌면 넌 버려진 게 아닐지도 몰라.


시답잖은 12년 동거인을 직접 버리고 종노릇 잘할 나를 새로운 가족으로 직접 간택한 걸지도 몰라.

이왕 시작한 거 내가 너의 충실한 무수리 할게.



안 봐도 뻔히 힘들었을 너의 12년 견생 다 잊도록, 내가 앞으로 제대로 모셔줄게.


미남이 할배, 어찌 오늘 간식은 마음에 드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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