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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Aug 01. 2017

<군함도> by 류승완

섞이지 않는, 섞일 수 없는.

<군함도> (이하 영화)는 부족한 지점이 꽤 많은 영화이다. 많은 사람이 지적한 '역사왜곡'을 지적하지만, 사실 영화는 굳이 고증에 충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겠다. 그걸 빼고 보더라도, 영화는 엉성하다. 


우선, 이 영화는 '국뽕' 논란을 피할 수 없는 작품이다. '국뽕'이 나쁜 거냐라는 질문부터 생각해보자. 쉽게 답하긴 어렵다. 하지만 나는 이 '뽕'은  민족국가 성립 이래로, 이것은 '팔리는 제픔' 이기도 하며, 세계시민으로 모두가 각성하지 못하는 시점에서는 충분히 훌륭한 사회 안전망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때문에 '뽕' 이 함유된 영화라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덩케르크> 역시, 일종의 '영국 뽕'의 비판에서 마냥 자유로울 순 없다. <덩케르크> 가 '뽕'을 놓는 방식은 얼핏 보면  <스파이더맨>에 '성조기' 가 등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메시지가 향하는 바는 '진보적'인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메시지를 담지 못하고, 그저 '뽕' 으로의 기능으로 - 마케팅의 수단으로,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편이다. 때문에 관객들에게는 그래서 어쩌라는 식의 느낌밖에 들지 않아 보인다.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서사도 영화의 문제점 중 하나이다. 서사는, 그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품은 특정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 같아 보인다. 촛불들이 등장하는 씬. 민족 반역자를 처단한다고 외치는 씬. 욱일승천기를 찢는 씬. 이런 장면 장면은 잘 뽑혔지만 그 사이의 연결고리가 빈약하다. 뜬금없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영화는 '부연설명'을 많이 첨가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장치들이 서로 삐그덕거리면서, 이미지는 아름답게 남았지만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말년은 위안부 시절의 이야기를 쭉 늘어놓아야 하고, 박무영이 파견되기 전의 이야기를 보여주어야 하며, 소장의 상사가 어린아이를 학대하는 사람임을 굳이 꼭! 보여주어야만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 한국 사람들이 서로 반목한 부분에 대한 묘사들은 필요한 장치이지만, 또한 부연설명으로 인하여 멍하게 보고, 듣기만 하게 되었다. 이강옥과 최칠성의 입에서 묘사되는 조선인에 대한 묘사들. 사실이겠지만, 그대로 보여주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편한 것을 꼭 집어서 설명해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면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식민지, 이념논쟁 등등 이러한 특수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군함도'라는 소재가 꼭 필요했을까? 


그러니 착한 일본인도 있다!라는 묘사는 부족했고, 또한 애매하게 등장했으며 나쁜 조선인은 불필요하게 튀어나온 모습을 영화는 보여준다. '사람'에게 집중하고 싶었다면 이런 장치들을 더 극적으로 잘 살릴 수 있었겠지만 이러한 모습은 그려내지 않고 있다. 처음 언급한 '국뽕' 적인 요소 때문일까? 역사에 없던 사실들을 등장시켜 '정신승리'라는 비판을 받을 법한 상황을 그려내면서 굳이 이런 것 까지 섞어야 했을까? 아니 섞일 수 있는 부분일까? 


영화는 이렇게 애매하게, 어설프다. 이런 상상도 들긴 했다. '류승완'감독이 그간 흥행을 많이 시키면서 꽤나 독립적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받긴 했지만 '놀란' 만큼은 안되는구나. 또한 '액션'과 '이미지'에 대한 강박을 버리기는 힘들었겠구나. 


하지만 영화의 연출, 이미지 등은 훌륭했고, 배우들의 연기도 괜찮았다. 황정민의 연기는 언제나처럼 훌륭했고(물론 그 언제나를 이제는 뛰어넘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송중기는 가장 잘 팔리는 자신의 이미지를 재활용했지만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으며, 소지섭도 역할에 충실했으며, 이정현의 연기는 돋보였다. 김수안의 연기는 훌륭했으며, 영화 마지막에 관객에게 시선을 보낼 때에는, 저 나이에도 저런 표현이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런 김수안이 분한 '소희'에게 더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희망' 이 있었다라며 자위할 거이라면 그런 쪽으로 더 많이 신경을 쓰며 좋았을 것 같다. 영화 속에서는 그런 모습이 종종 보이긴 했다. 이강옥과 박무영이 대립하는 과정에서도 '소희'는 화해의 매개였다. 만약 내가 시나리오에 참여할 수 있다라면, 그런 이야기를 - 뻔하지만 - 쓰고 싶다. 뒤틀린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인간성'을 말살하는 시대에, 다음 시대에 희망을 맡기는 이야기. 조선인과 일본인을 가리지 않고 '악' 은 평범성에, 제도 속에 녹아 있지만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희망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 화려한 액션과 이미지, 불필요한 반전은 빼고 말이다. (사족이지만, 이경영의 출연 자체가 이미 스포일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 영화는 '힘'을 빼고 접근했으면 어떨까 싶다. 앞선 진술을 뒤집겠다. '류승완' 감독에게 재량권이 덜 부여되었다면, 그는 아예 자본의 접근으로 <국제시장>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거나, <짝패> 때와 같은 액션을 '군함도'라는 소재 안에서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지 않을까. 그러나 둘은 섞일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충분히 상업적으로 - 그리고 그 안에 철학을 담아서 '군함도' 혹은 '일제 시대'의 우리네 이야기를 전달할 방법은 아직 찾기 힘든 것 같다. 


그 부분이, 슬프다. 우리는 아직 그 시대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말이니까. 영화 자체로는 그럴 수 있다. 영화라는 작품은 여러 시도를 거치면서 이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낼 것이니까, 비판 속에서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영화를 둘러싼 논쟁은 소모적이다. '군함도'를 다루면서 '역사왜곡'과 '국뽕' 같은 부분들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려면 우리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대한민국' 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류승완 감독은 복잡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감독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이번에 섞을 수 없는 것들을 섞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무모하게 덤벼든 것 같다. 하지만 평단과 대중의 반응을 보면 그것은 여전히 섞기에는 어려운 것 같다. 아무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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