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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Dec 16. 2017

<와치맨> by 엘런 무어

삶이라는 조크.

와치맨은 엘런 무어가 쓴 그래픽 노블이다. '히어로'가 존재했다면, 이라는 가정의 '대체역사' 장르이기도 하다.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히어로' 물이 신화 텍스트와 유사하게 기능하는 점, 선전(propaganda) 도구처럼 사용된 점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시도란 생각이 든다. 특히, 책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비틀지만, 비켜가진 않는다. '닉슨'에 대한 것, '베트남전'에 대한 것 등. 때문에 훈련받은 특수요원 수준의 '가면 쓴 자경단'을 벗어난 슈퍼 히어로 '닥터 맨해튼'의 등장 이후의 역사가 변곡 되는 지점을 보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된다. 


과학 실험 중에 원자 수준으로 '분해' 된 '존 오스터맨'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재구성하고 미국 국방부 소속의 히어로가 된다. 그러면서 '닥터 맨해튼' 이란 이름은, 그 이름의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정부가 지어준다. 이로써 '신은 존재하며, 미국인이다'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다. 미국이라는 제국에 금권과 군사력, 문화 권력 외의 '슈퍼파워' 가 주어진다. 미국은 그래서 베트남전을 승전하게 된다. '닥터 맨해튼' 이 미국에 있기 때문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지 않는다. 그러니 '닥터 맨해튼'의 이름은 설득력을 얻게 된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연장선에 있다. 다만, 다른 나라에서 시도할 수 없는 '성공 사례'인 점이 다를 뿐. 


영웅신화는 보통, 당시 사회에서 '결여' 된 것을 반영한다. 임진왜란 이후의 한국의 소설들도 그렇다. 사명대사는 왜 초능력을 보유했는가? '마블코믹스' 가 한국인 히어로를 기용하고, 기존 캐릭터를 리붓하며 아랍계를 기용하는 것은 그들의 구매력의 상승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던 그들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구매력과 그 열망을 굳이 나눠 설명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때문에 '슈퍼 파워'를 보유하게 되는 미국에 대한 서사는, 상호 확증 파괴 속에서 핵전쟁의 위험을 느끼던 1980년대의 미국의 '결여'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의 서사는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져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 혹은 영웅 서사의 전형, 비범한 탄생에서 버려짐, 훈련, 고난 그리고 승리 같은 형태를 따르진 않는다. 오히려 그 결여를 채워줌과 동시에 그 '결여'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왓치맨> 은 다분히 사회고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구체적인 고발 내용은 없다. 하지만 기소된 대상은 전체이다. 국가, 국민 전부. 책 제목의 기원이 되는 'Who watches watchmen?'이라는 구절을 기존의 '자경단' 서사에 대한 성찰로만 보는 것은 좁은 해석이다. 물론 장르적으로는 중요한 질문이고, 유효한 것이지만 <브이 포 벤데타>의 저자가 단지 그것만 보고 던진 질문은 아니라는 것이 내 견해이다. 


최근 미국의 히어로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자경단'의 성찰은, 그 영웅 서사 밖에서도 의미가 깊다. 특히 그 배경이 미국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헌법에서 '자경권'의 조항을 찾아볼 수 있으며, 자기 방어를 위한 총기 구매를 허용하는 나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명제. 국가 차원에서 미국은 그것을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 '국제경찰'처럼 행동하며,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역할도 스스럼없이 수행한다. 이런 내용은 게임 및 게임의 파생으로 나온 그래픽 노블 <인저스티스>에서 '슈퍼맨' 이 연인 '로이스 레인'을 읽고 철권통치를 통해 평화를 가져오려고 하는 서사와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왓치맨> 속의 '슈퍼파워'는 거기에 무관심하다. 그는 '시간'을 인지할 수 있는 존재이다. 공간만을 볼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와는 다른 종. 그런 종이 과연 인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작중에서 닥터 맨해튼은 '무관심'하게 나온다. 오로지 그와 호모 사피엔스 종을 잇는 연결 고리은 '연인' 만을 중요시할 뿐. 그 고리가 끊어지자 그는 인류를 떠난다. 어쩌면 '슈퍼맨'의 서사보다 이쪽이 더 자연스럽다. 공장형 축산을 막고자 하는 인류 보다 그것에 대한 신경을 끄는 인류가 많은 것처럼 말이다. 


또한, '닥터 맨해튼' 조차도, 상호 확증 파괴 속에 인류멸망 시나리오를 막기는 거의 힘든 것으로 나온다. 작가가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르지만 - MD(missile defense)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단 한 발만 막지 못해도. 결국 인류의 문제는 인류 자체의 발전으로 해결해야 하지, 특정 초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서로가 핵무기를 폐기한다면 되겠지만, 반대로 서로가 핵무기를 확충해나가면서 냉전은 유지되고 평화는 유지될 수 있다. 


그래서 작중 가장 똑똑한 인간이라고 묘사되는 오지만디아스 (에이드리안 바이트)는 다른 해결책을 내놓으려 한다. 그는 가상의 적을 디자인해서 던져놓으려 한다. 묘하게 노회찬 의원이 발언이 떠오른다. '아무리 서로 싸우는 사이더라도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같이 뭉쳐 대항해야 하지 않습니까?' 오지만디아스는 실제 '외계 생물체'가 없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만들어내어서 가짜 침공을 기획하고 실행, 성공한다. 


그의 작품은 - 시간을 인지하는 닥터 맨해튼이 직접 의미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서글픈 일이다. 우리는 공동의 적이 있어야만 뭉칠 수 있다. 잠깐, 이건 기존의 '통치 방식'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외부의 적을 가르쳐주고, 울타리를 치는 일. 과거 - 그리고 지금의 국가가 여전히 사용하는 방식이며, 아직까지의 인류에게 잘 들어 먹히는 방식이다. 오지만디아스는 다만, 아직까지 이념과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인류의 사고 지평을 단숨에 우주, 그리고 다른 종족과의 경쟁구도로 올려놓았을 뿐이다. 변한 것은 없다. 때문에 작중에서 로어셰크의 일지가 언론사로 넘어간 장면이 없더라도, 닥터 맨하탄의 마지막 경구는 의미가 있다. '아무것도 영원히 끝나는 것은 없다.' 


한편으로는 특정 초인들이 결정한 울타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나루토는 무한 츠쿠요미를 통해 인류를 세뇌하려는 계획을 봉쇄한다. 이러한 서사는 왜 나오는가? 엘시 에더리는 자신 스스로 죄를 지으면서 수백조의 죽음을 수백억으로 줄여내려는 이라세오날의 계획을 분쇄한다. 배트맨은 슈퍼맨의 철권통치에 저항하며, 기미와 달리는 스파이럴 네메시스를 막기 위해 우주로 날아간다. 이런 서사는 왜 나오는 것인가? 약속된 평화에 대해서 왜 우리는 거부하는 서사를 매번 내놓는가? 로어셰크는 '타협하지 않는 것' 뿐인가? 


자유의지라는 환상이 있다. 대체로 방황하는 삶에 좋은 진정제가 된다. 그 '자유의지'의 가치는 얼마나 되는 것인가? 절대다수의 절대 안전이라는 가치 앞에서 자유의지는 얼마나 힘을 쓸 수 있는가? 이건 빨간약과 파란 약의 문제와도 같다. 왜 누군가는 빨간 약을 먹는 것인가? 인류가 합리적이지 못해서인가? 이콘(경제학적 인간) 이 되지 못하기 때문인가? 나는 많은 부분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에서 저자 김동조는 '전략적이지 못하면 철학적 이기라도 해야 한다.' 하고 말한다. 나는 김동조 씨와 생각이 다르다. '전략적이기보다, 철학적인 것이 먼저여야 한다.' 철학은 사고의 영역이다. 사고는, 본질적으로 상상의 영역이다. 민주주의, 평등, 생명의 소중함 이런 것들은 적어도 명시적으로 우리 탄생과 함께 주어지는 것들이 아니다. 수천 년의 역사에서 우리가 함께 상상해온 것들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지적한 것들은, 때문에 그런 가치가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이 우리 공동의 상상인 덕분에 너무나 소중하단 말이 된다.


다시, 자유의지는 상상의 것이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적어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타파할 무언가가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메타-인지를 우리를 포함하여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닥터 맨해튼을 이해할 수 없다. 닥터 맨해튼이 우리를 이해해서 생명을 만들기 위해 다른 은하계로 떠날 수는 있지만, 우리는 닥터 맨해튼의 사고를 결코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 가치는 '실존' 하게 된다. 비트코인 같은 것이다. 우리의 관심이 어디까지 쏟아지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때문에 '자유의지'를 믿는 많은 서사 작가들은 우리가 육종 되는 것 이상으로 발전하고, 진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며 나는 거기에 내 표를 더하고 싶다. 물론, 가능성은 매우 낮고, 내 삶 내에 이뤄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와치맨> 속의 캐릭터에서 '코미디언'의 자세가 기본적인 내 자세와 같다. 삶은 '조크' 다. 냉소주의자는 가장 이상주의자들이다. 


하지만 나는 세상의 '로어셰크' 들을 믿는다. '나이트 아울'을 믿는다. 누군가는 타협하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는 지금의 평화를 지키려 할 것이다. 그게 자연스럽다. 닥터 맨해튼이 말했듯, 끝나는 것은 없다. 적어도 끝나기 전에는 끝이 날 것이라고 말할 순 없다. 우리는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니까. 다만 타협과 비타협 사이에서 우리가 믿는 바를 관철하고, 끈질기게 상상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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