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사와 나오키 & 나가사키 타가시, 희망을 그리다.
단비뉴스의 글 <언더 위의 구름에 갇힌 일본>을 읽었다. 일본의 주류 역사관에 대한 해당 글을 읽으면서, 문득 <빌리 배트>의 리뷰를 미룬 지 1년이 넘게 지났음을 알게 되었다. 마침, 이불 빨래를 할 시기가 와서, 빨래방에서 이불을 하나하나 세탁기에 말아 넣고 <빌리 배트>를 읽고, 쓰기 시작했다. (2018.07.08)
<빌리 배트>(이하 책)의 저자 중 1인은 '우라사와 나오키'이다. 일본의 유명 만화가인 그는 <몬스터>, <Pluto> 그리고 <20세기 소년>을 그렸다. 그중, <20세기 소년>을 읽으면서, 그리고 일본의 '오옴진리교'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생각했던 리뷰를 쓴 적이 있다. 그 글을 쓰면서, 작품에 담긴 일본 사회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과거의 따돌림, 미래에 대한 열망, 80년대의 황금 시기를 거쳐 잃어버린 10년, 오옴진리교의 사린 가스 테러 사건. 그리고 작가는 과거에 대한 화해를 시도하고,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던지는 메시지로 작품을 끝냈었다.
<빌리 배트>는 그 무대를 일본 밖으로 확장해본다. 나치, KKK 단, 케네디 암살 사건, 9.11, 티베트 등 세계의 문제들과 누가 봐도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를 떠올리게 하는 '빌리 배트' 리는 만화 캐릭터를 가지고 짧게는 전후 일본에서 현재까지, 길게는 선사시대에서 근미래 (2060년쯤)까지 인류와 박쥐, 그리고 그 관계에 대해서 그려나가고 있다. 일종의 인류의 실패의 순간들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회피한다. 미군정의 횡포에 대해서 쓰고, 고베 대지진을 그리면서 일본의 제국주의 시절 벌인 잘못들을 비켜 나가고 있다. 작품에 대해 비판을 하는 글들에서 이 내용은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 같다. 때문에 <언덕 위의 구름에 갇힌 일본>의 글을 읽으면서 <빌리 배트>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전쟁 범죄를 누락한 것이, 저자가 의도한 것이건, 아니면 자연스럽게 가진 역사관에서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다. <빌리 배트>는 저자 우라사와 나오키가 존경하는 데즈카 오사무가 그랬듯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에서, 일본의 전쟁 범죄를 빼놓고 평화를 설파하기에 충분한 설득력을 얻기에는 일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제국주의 시절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긴 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특수성을 빼놓고 보면, 이 만화책은 복잡한 이야기를 재밌게 잘 풀어놓고 있다. 특히, '빌리 배트'를 밈(meme, 문화 유전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개념으로 만들어내면서, 시공간을 뛰어넘는 작중 인물들의 활극을 잇는 연출은 빼어나다. 선사시대부터 존재해온 '박쥐' 심벌을 가지고 해석하고, 행동하는 모습들은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서사들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의 언급과도 같다. 사람의 상상은 이야기가 되어, 역사를 움직여왔다. 종교라는 상상, 이데올로기라는 상상.
작품은 그 상상의 이면에 '박쥐'라는 심벌이 있었다는 '공상'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한다. 미술 학교 진학에 실패한 히틀러에게도, 케네디를 암살한 오스왈드에게도. 그리고 '신'과 같다는 묘사를 작품의 말미까지 끌어 가다가, 전복시킨다. 박쥐는 그저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결정은 사람의 몫이다. 작품 내내 나오는 '흑이냐, 백이냐'는 인간이 박쥐를 본 다음 상상한 결과에 대한 것뿐이었다. 마치 이영도의 <오버 더 미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징조는 징조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사람의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빌리 배트>는 주인공 '케빈 굿맨' 에게 계속해서 그리라고 한다. 계속된 이야기를 상상해 나가는 것은 사람의 몫이고, 능력이니까.
결국, 어떠한 종교나 사상도 개념일 뿐이다. 우리가 더 나아지기 위해 상상의 결과물이다. 우리 선택의 도우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이정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작품에서 나오듯, 만화가는 계속 그려야 하고,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퉁구스카의 <납골당의 어린 왕자>에 나온 이 대사가 떠오른다. "세상이 원래 이런 거 야랑 세상이 원래 이래야 한다는 건 완전 다른 이야기예요, 이 나쁜 새끼야!" 흔히 말하는 세상이 이미 잘못되었기에 나의 잘못도 나의 것이 아니라는 자기 정당화를 하는 인물에게 작중 주인공이 하는 대사였다. 나는 <빌리 배트>의 이야기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서사를 다루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지향해야 할 바는 이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문학은 '세상이 원래 이런 곳이다'를 고발하는 것을 넘어서서 '세상은 이럴 수도 있어'를 보여 주는 것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작가는 현재, 현실에 대한 탐구를 넘어서서 미래상을 보여주기 위해선, 말이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또 그려야' 한다. 그렇게 <빌리 배트> 같은 만화, SF나 판타지가 탐구해야 할 것은 현실이 아닌 공상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