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매일 글쓰기 (012/100)
<원피스>에 나오는 말입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사나이의 출항을 방해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식으로, 작중의 드래곤 이라는 아저씨가 스모커 중령을 막으세우며 루피 일행을 보내주는 데 일조할 때 한 말입니다. 작중의 여러 비밀들이 풀려난 지금에는 '아니 이거 그냥 지 아들 도와준 거잖아' 싶지만, 괜히 이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을 막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생각해 보니 처음 퇴사 진단서를 쓸 때도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네요. 여하튼, 여전히 바뀌지 않았습니다. 안녕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새로운 꿈이 있는 사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응원할 따름이지요.
그렇지만 다시. 우리의 동료가 우리를 떠난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참 힘겹습니다. 온갖 생각이 다 들고요. 서운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또 내가 뭘 잘못한 것은 없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함께한 지난 세월은 충분히 충실했던가? 거기에 답하기는 쉽지가 않더군요. 이제와 돌아보면 더 잘할 수 있는 것들은 꽤 있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이제는 끝난 이야기입니다. 브로콜리 너마저가 불렀듯, 결정된 사항에 <앵콜 요청 금지>입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럼에도 지나간 것을 추억할 순 있겠죠.
우리를 떠나는 동료는 스스로를 '제품 디자이너'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제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말은, 정체란 이름도, 태어난 곳도 아니고 꿈, 아니 그 꿈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 그 자체라는 글귀입니다. (폴라리스 랩소디라는 책에 나옵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자를 붙잡을 수 없는 미련도 역시 아름다움의 일부이겠습니다.
떠나는 동료와 1:1을 할 때, 제가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었던 때가 기억이 납니다. 이야, 이제 내가 쓸모가 없구나! 그게 슬프거나 무력감이 느껴지기보다는 더 힘이 나고, 이게 청출어람이라는 순간이구나 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르친 것은 없는데 무언가 이미 성장한 동료를 보고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새롭고 어려운 업무가 밀려올 때, 사지로 보낸 동료가 훌륭하게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그래, 나 이거 된다, 의미가 있다고 마음을 다잡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1:1 맨날 계속하고, 팀 어떻게 운영할지 고민하고, 이러느니 조금이라도 그냥 나라도 기획서 쓰고 하는 게 낫지 않은가? 이 시간들에 대해서 여러 책들이 필요하다고 했고, 마음속으로 그렇지라는 이해는 있었지만 체감하기에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점으로, 떠나는 동료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떠나야만 한다는 말을 한 그때에, 좀 힘들긴 했습니다. 여러모로 고민을 해보았는데, 아무래도 제가 첫 팀장으로 부임한 이후의 팀원 중 마지막 일원이 떠나는 것이더라고요. 먼저 떠난 사람들 이름도 떠오르고, 무언가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떠났던 이름들과 내가 지키지 못했던 약속들. 핑계의 무덤 속에 묻혀버린 것들을 끄집어내면서 며칠을 보낸 것 같습니다. 아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온전하게 처음 말했듯, 꿈을 찾아가는 사람을 막는 것은 참 멋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곤조,라는 말을 몇 번이고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한 50번은 했던 것 같아요. 개개인에게 1:1 하면서 말한 것과 '멋'이라는 단어로 변주한 이후를 세어보면 100번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그것을 꺼내서 말해보죠. 멋이란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우선은 스스로에게 친절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멋져질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장인정신으로 스스로의 결과물을 계속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더 나아질 점을 찾아야겠지만. 거기서 지쳐버릴 확률이 크기 때문에 나 스스로는 나의 작업물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그 작업물과 나를 등치 하는,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과정, 내 실수와 실패까지 긍정하고. 여기까지가 지금의 나, 최선임을 긍정하고 외부의 평가에 대해서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때. 그리고 동료 분이 퇴사 부검에서 써준 말처럼 그 과정에서도 충분히 친절할 수 있을 때. 자신의 현재의 부족함을 겸허히 인정하고, 오케이, 그럼 이제 뭘 할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세에서 멋이 묻어 나올 것이라고 요즘은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부족함이 있더라도, '내 이름을 걸고' 내보낼 수 있습니다. 과거는 어차피 돌이킬 수 없을 테니 거기에 대해서 고민할 필욘 없겠죠.
그럼 이 곤조라는 제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제가 요구한 것들을 떠나는 동료분이 충분히 가지고 있었는가 하면, 갈수록 늘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UI 만 하는 것 별로다!라는 식의 1:1 에서부터 당황했던 제가 떠오르고. 그렇다면 이런 걸 해볼까 했을 때, 이건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 같다!라는 식의 피드백에서 으악 어쩌라는 거지라고 생각한 수년 전의 제가 떠오르네요. 그때는 참 뭣도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솔직한 피드백 덕분에 좀 더 세심하게 고민하고, 어떤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지 잘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실 더 성장한 것은 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설하고, 그 이후에 이제 떠나는 동료분이 매일 매주 매달 해온 일들을 잠깐 생각해 보면, 아무런 방향 없던 제품에서 새로운 방법론을 주도적으로 적용해 보고. 유저 테스트를 직접 짜고, 시행해 보고. 개발자 동료들에게 디자인과 UX에 대해서 세미나를 진행하고. 개발, ML의 원리에 대해서 궁리하고. 네트워크 환경과 RTSP와 같은 새로운 것들과 익숙해져 가면서 이제는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제품으로 기능하는 무언가가 나왔습니다. 짝짝짝의 순간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 함께했던 동료분과, 동료분과 함께한 분들은 어찌 느낄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발짝 떨어져서 본 입장에서는 이거 역시 전술한 1:1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제품을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론을 탐구하고, 공부하고, 실험했고 그, 중 하나가 동료분이 속한 조직의 형태였습니다. 제품팀을 구성하고, 미션을 부여하고, 그들이 해결책을 스스로 궁리하고 찾도록 해랴. 이게 스무스하게 돌아갔다거나, 이 내용에 대해서 제가 잘 전달하진 못했는데 말이죠, 되더라. 이 말입니다.
물론 이 된다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을 것입니다. 제품의 특성, 외부의 간섭에 대한 통제, 제품팀 개개인의 특성과 구성.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떠나는 동료 분의 열정과 멋, 그러니까 곤조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뭘 하라고 해도, 왜 해야 하는지 궁리하고, 그냥 하자를 넘어서 유저 테스트를 실시하고. 매 스프린트 QA 하고 회고하고 계획해 나가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거 된다의 순간이 이 경우에는 천천히 다가오긴 했습니다. 가끔씩 보고 있으면, 조금씩 발전하는 조직이, 동료분이 보였고 그게 이제야 돌이켜보니 엄청난 순간들이었다고요. 다른 동료 분이 버스팩터를 설명하면서 우리의 버스팩터를 이야기하던 어느 겨울의 술자리가 기억납니다. 정말로, 모두 하나하나 그 역할을 주어진 이상으로 수행하여 이뤄낸 멋진 순간이었습니다.
아쉬움만 가득하니, 글을 미리 쓴다는 약속은 잊혔고. 급하게 쓰고 있는데 참 나오지 않습니다. 힘든 퇴사부검을 시켰으니 진단서를 빠르게 쓰겠다는 약속이라도 지켜야 하는데, 어렵습니다. 좋은 글을, 좋은 말을 전달하고 싶다는 욕심만 앞서고 실제로 손가락은 아쉬움에 주저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이 넘어가는 시간 동안 한 글을 잡은 게 얼마만이었던가. 싶네요.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더 잘 쓸 수 있었을까요? 흠, 아닐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퀄리티는 들이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을 때가 많고, 글도 아마 그렇겠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좋은 제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동료분이 질문했을 때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근간. 스스로 좋은 제품을 만들고자 다짐하고, 협업하기 위해서 친절할 수 있는 것. 어려움이 수반함을 인정하고 노력하는 자세. 그 과정에서 친절함을 잊지 않고 타인에게 나눌 수 있었던.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까지 겸비했던 동료의 모습을 오랫동안 기억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자주, 동료분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언젠가 어디선가 읽은 글이 기억납니다. 스티브잡스에게 월터 아이작슨이 네게 생각하는 너의 최고의 아웃풋이 무엇이었냐고요. 그가 답한 것은 아이폰도 맥도 아니고 '팀'이라고 한 답변이. 요즘 계속 생각하는 저의 아웃풋, '제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또 요즘 계속 이야기하는 것처럼, 'if you don't name on it, don't ship it'을 떠올립니다. (에어비앤비 아저씨의 말일겁니다)
이제 떠나는 동료분에게 우리의 동료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가? 저는 그 대답에 네!이며 거기에 제 이름을 서명하여 보낼 수 있기에 아쉬운 마음을 접고 언젠가 더 넓은 세상에서 만날 날을 고대하며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동료분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합니다.
초고: 2024년 7월 11일
탈고: 2024년 10월 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