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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티지와 혁신의 줄타기: 래거시 브랜드의 생존 공식

365 Proejct (267/365)

by J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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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래거시 브랜드들은 매일 "브랜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합니다. 전통에만 안주하면 '구식'이라는 비판을 받고, 과도한 혁신을 추구하면 '정체성을 잃었다'는 비판에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수작업 가죽 공예를 고수하면서도 애플워치 밴드를 만드는 에르메스, 140년 전통을 자랑하지만 가상현실 패션쇼를 여는 구찌, 그리고 창립자의 철학을 지키면서 K-pop 아이돌을 앰버서더로 기용하는 샤넬의 사례는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성공적인 해법을 찾아낸 경우입니다. 이들의 비밀은 헤리티지를 과거의 유물로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가는 '살아있는 유전자(DNA)'로 다루는 데 있습니다.


많은 브랜드가 헤리티지를 '옛날 방식 그대로 따라 하기'로 오해하지만, 진정한 헤리티지는 구체적인 형태(Form)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원리(Principle)와 철학입니다. 예를 들어, 에르메스의 헤리티지는 '가죽을 손으로 재단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최고 품질의 소재로 완벽한 제품을 만든다'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이 있기에 전통적인 버킨백과 혁신적인 애플워치 밴드를 모두 '에르메스답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샤넬의 헤리티지는 '트위드 재킷'이라는 형태에 국한되지 않고 '여성을 옷의 노예에서 해방시킨다'는 창립 철학에 있습니다. 1920년대의 해방이 코르셋으로부터의 자유였다면, 2020년대의 해방은 성별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자유일 수 있기에 젠더리스 향수나 남성복 라인 출시가 그 철학의 자연스러운 확장이 됩니다.


성공하는 브랜드들은 이처럼 헤리티지를 여러 층위로 깊이 있게 분석합니다. 가장 깊은 곳에는 루이비통의 '여행의 예술'이나 코카콜라의 '행복 공유'처럼 절대 변하지 않는 브랜드의 존재 이유인 '철학 레이어'가 있습니다. 그 위에는 철학을 구현하는 방법론인 '원리 레이어'가 있는데, 에르메스의 '수작업 장인정신'처럼 시대에 따라 적용 방식이 유연하게 바뀔 수 있습니다.


가장 바깥쪽에는 버버리의 '트렌치코트 제작법'과 같이 기술과 시장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기법 레이어'가 존재합니다. 혁신은 주로 기법과 원리 차원에서 일어나며, 가장 핵심인 철학은 굳건히 보호함으로써 브랜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브랜드들은 혁신에 접근할 때 무작정 시도하기보다 전략적인 방식을 사용합니다. 구찌는 알레산드로 미켈레 부임 이후, 기존 시그니처 아이템의 소재와 색상을 바꾸는 '안전지대'에서 시작해 스트릿웨어 같은 새로운 카테고리로 확장하고, 나아가 메타버스와 NFT 같은 '실험지대'로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동심원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루이비통이 슈프림과 협업하여 스트릿 문화의 정통성을 얻거나, 나이키가 디올과 만나 럭셔리 미학을 결합한 것처럼, 전문 파트너십을 통해 리스크를 분산하고 새로운 고객층을 확보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LVMH가 펜티(Fenty) 브랜드를 통해 대담한 실험을 하고 그 성공 요소를 다른 브랜드에 적용하는 것처럼, 별도의 '실험실 브랜드'를 운영하여 혁신의 위험을 관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성공과 실패의 사례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버버리는 트렌치코트라는 헤리티지를 디지털 혁신과 결합하여 젊은 세대에게 가장 '인스타그램어블'한 아이템으로 재탄생시켰고, 구찌는 장인정신을 지키면서 젠더리스와 맥시멀리즘이라는 새로운 미학을 도입해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습니다.


반면, 고객과의 소통 없이 핵심 정체성인 로고를 갑자기 바꾼 갭(Gap), 기존의 캐주얼 이미지를 버리고 과도한 럭셔리화로 기존 고객과 신규 고객 모두를 잃은 제이크루(J.Crew)는 정체성을 잃은 혁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실패 사례로 남았습니다.


오프라인 공간 역시 헤리티지와 혁신이 공존하는 중요한 무대입니다. 루이비통 파운데이션이나 구찌 가든처럼 플래그십 스토어를 브랜드의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이자 최신 기술과 예술을 체험하는 '실험실'로 활용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샤넬이 전 세계에서 각 지역 문화와 결합한 팝업 스토어를 열거나, 에르메스가 전통 공예 기법으로 세상에 하나뿐인 제품을 만들어주는 커스터마이제이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헤리티지와 혁신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지점을 잘 보여줍니다.


궁극적으로 브랜드는 '헤리티지 지수(기존 고객 충성도, 브랜드 연상도 등)'와 '혁신 지수(신규 고객 유입률, 소셜미디어 언급량 등)'를 데이터로 측정하며 두 가치 사이의 균형을 끊임없이 관리해야 합니다. 특히 전통을 중시하는 기존 세대와 새로운 경험을 선호하는 신규 세대의 반응을 각각 분석하여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의 대담한 혁신이 미래에는 그 브랜드의 새로운 헤리티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코코 샤넬의 여성복 혁신이 오늘날 샤넬의 DNA가 되었듯, 현재 시도되는 지속가능성, 디지털 패션, 문화적 다양성 같은 가치들이 미래 세대가 기억할 새로운 전통이 될 것입니다.


결국 헤리티지와 혁신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헤리티지가 혁신의 방향을 제시하고 혁신이 헤리티지를 시대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상호보완적 관계입니다. 100년 후에도 살아남을 브랜드는 과거를 복제하며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정신으로 미래를 창조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는 브랜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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