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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에 이어서 생각하기 030: 2분 기록법(틈새 저널링) 에 이어서
내 글에 이어서 생각하기 031: 무시를 대하는 삶의 태도에 이어서
삶의 매뉴얼 001: 단단해지기
단단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무시를 이겨내는 내면의 철학'을 갖추는 일입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나를 모르며, 나의 노력을 일일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결함이 아니라 구조 그 자체입니다. 70억 인구가 사는 세계에서 각자는 자신의 생존과 행복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타인의 무관심은 악의가 아니라 필연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무대에서 주인공이기에, 누군가의 조연이 되어줄 여력은 애초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타인의 무관심에 억울해하거나 상처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비가 오는데 "왜 나를 피해가지 않느냐"고 하늘을 원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는 누구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저 비일 뿐입니다.
우리는 외부의 인정이 아닌, 명확한 내부의 기준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삶의 중심에 두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좌우되는 불안정한 존재가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타인의 눈을 거울 삼아 자신을 확인하려는 습관은 결국 자신을 소진시킵니다.
단단함이란, 이처럼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스스로 방향을 잃지 않는 중심감각이며,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외로움을 견디는 내면의 근육입니다. 주목받지 않아도 일관된 사람, 칭찬받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가 바로 단단한 사람입니다.
이는 마치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표면의 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땅속 깊이 내린 뿌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 나무를 칭찬하든 무시하든, 나무는 자신의 리듬으로 자라납니다.
이 단단함을 '둔감함'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무시를 이겨내는 힘은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판단이 정밀해지는 데서 나옵니다.
둔감한 사람은 모든 것을 무시하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단단한 사람은 모든 것을 느끼되, 그것에 대한 해석과 반응을 선택합니다. 마치 숙련된 검객이 날아오는 화살을 보면서도 피할 것과 막을 것을 순간적으로 판단하듯이, 단단한 사람은 세상의 신호를 정확히 읽어냅니다.
세상의 모든 비난과 무관심이 온전히 나를 향한 것은 아닙니다. 무시 속에는 여러 층위가 존재합니다:
첫째, 타인의 한계에서 비롯된 무관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이해 범위 안에서만 세상을 봅니다. 내가 10년간 쌓아온 전문성을 단 5분의 대화로 이해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들의 무관심은 내 가치의 부재가 아니라, 그들의 시야 밖에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둘째, 관심을 가장한 비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을 타인에 대한 평가로 표출합니다. "네가 하는 일은 무의미해"라는 말 뒤에는 종종 "나는 그것을 할 용기가 없어"라는 자기고백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비판은 나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들 내면의 두려움이 투사된 것입니다.
셋째,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라는 신호로서의 무시도 존재합니다. 세상이 조용할 때, 그것은 내가 아직 세상에 명확한 메시지를 전하지 못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이는 좌절의 이유가 아니라, 더 깊이 파고들라는 우주의 암시입니다.
넷째, 시기적 무관심도 있습니다. 씨앗이 땅속에서 싹을 틔우는 시간, 아무도 그 과정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침묵의 시간이 없다면 새싹은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때로는 무시받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성장의 시간입니다.
단단한 사람은 이 차이를 구분합니다.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이것이 나의 영역인가, 타인의 영역인가?"를 정확히 판단합니다. 타인의 판단은 그들의 자유 영역이지만, 나의 방향은 오롯이 나의 책임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는 스토아 철학의 핵심인 '통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구분'과 일맥상통합니다. 에픽테토스는 말했습니다. "어떤 것들은 우리의 통제 안에 있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명확한 경계의 감각이 곧 평정심을 가져옵니다. 타인의 반응은 그들의 몫, 나의 행동은 나의 몫.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구분이 내면의 평화를 만듭니다.
물론 이러한 단단함은 순간의 각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단련의 결과입니다. 단단함은 하루아침에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쌓아 올리는 건축물입니다. 스스로를 지탱하는 몇 가지 습관이 필요합니다.
하루 10분이라도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공간에서 오직 나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음이 끊긴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나의 생각이 자기 목소리를 냅니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SNS, 메시지, 이메일... 하루 종일 타인의 의견과 반응에 노출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마치 시끄러운 시장 한복판에서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를 듣는 것처럼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고요의 시간은 단순히 조용한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면의 나침반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방향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고요 속에서만 제대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는: 아침 기상 후 핸드폰을 보기 전 10분, 또는 잠들기 전 하루를 돌아보는 10분을 확보합니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만큼은 타인의 기대, 판단, 요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타인의 평가를 기다리는 대신, 매일 하나의 일을 스스로 끝내는 '완료의 감각'이 나를 지탱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도 오늘의 완성으로 내일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성취를 꿈꾸지만 작은 완성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단단함은 거창한 업적이 아니라 일상의 성실함에서 나옵니다. 오늘 계획한 페이지를 다 읽었다면, 오늘의 운동을 마쳤다면, 미뤄두었던 이메일에 답장을 보냈다면 - 그것은 모두 완성입니다.
이 완성의 감각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내가 나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알아주든 말든, 나는 내가 정한 것을 해냈다는 사실. 이것이 쌓이면 자기신뢰가 생깁니다.
자기신뢰는 자만과 다릅니다. 자만은 "나는 완벽하다"는 착각이지만, 자기신뢰는 "나는 내가 말한 것을 해내는 사람이다"는 경험적 확신입니다. 이 확신이 있을 때, 타인의 무시는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합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루 종일 하나만 완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웁니다. 책 한 장, 글 한 편, 프로젝트의 한 단계.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이것을 끝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하나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들기 전, 그것을 확인하며 스스로에게 작은 승인을 줍니다.
누가 나보다 앞서는지 보지 않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기록하며 그 차이에만 집중합니다.
비교는 모든 불행의 원천입니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편집된 성공'을 봅니다. 누군가의 승진, 누군가의 여행, 누군가의 행복한 순간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그들 삶의 하이라이트일 뿐, 그 뒤의 고민과 좌절은 보이지 않습니다.
비교의 함정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고, 항상 내가 부족해 보입니다. 이 게임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대신 기록은 나만의 성장 궤적을 만듭니다. 1년 전 내가 쓴 글과 오늘 쓴 글을 비교하면, 나의 성장이 보입니다. 6개월 전 나의 고민과 오늘의 고민을 비교하면, 내가 어떤 문제들을 해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의 힘은 "나는 계속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타인이 인정하지 않아도, 숫자로, 글로, 이미지로 나의 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나를 무시할 때 꺼내볼 수 있는 '나만의 증거'가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노트, 일기, 또는 디지털 기록 도구를 활용합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일관성입니다. 매일 한 줄이라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나의 생각, 배움, 성취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월말, 분기말 등) 돌아보며 나의 여정을 확인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사람은 언젠가 나를 이해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에게도, 나를 오해하는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설명하고 변명하고 증명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애초에 당신을 이해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선입견, 질투, 또는 무지 때문에 당신을 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에너지를 소진시켜 정작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반면 진정으로 당신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많은 설명 없이도 당신의 본질을 봅니다. 그들은 당신의 의도를, 노력을, 진정성을 알아봅니다.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에 에너지를 쏟는 것이 현명합니다.
이는 냉정함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를 이해하는 소수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삶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누군가 당신을 오해하거나 비난할 때, 한 번은 명확히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설득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받아들이고, 내 일에 집중합니다.
이 습관들이 쌓이면 삶에 '방향의 일관성'이 생깁니다.
단단하다는 것은 애초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강철 기둥이 아니라 대나무의 단단함입니다. 흔들리되 결코 부러지지 않는 것, 그것이 단단함의 본질입니다.
삶에는 수많은 유혹과 방해가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 사회의 기대, 순간적인 감정들이 우리를 흔듭니다. "이 길이 정말 맞는 걸까?"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의심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방향의 일관성을 가진 사람은 흔들림 속에서도 중심을 회복합니다. 잠시 길을 잃어도 다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가는 길의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힘입니다. "나는 완벽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일관되려 한다."는 태도입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무시에 좌절합니다. 하지만 일관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실수해도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걷습니다. 마치 강물이 돌에 부딪혀도 결국 바다로 흐르듯이, 그들은 장애물을 만나도 자신의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이 일관성의 힘은 시간이 지나면서 복리효과를 냅니다. 10년간 한 방향으로 걸어간 사람과 매년 방향을 바꾸며 걸어간 사람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전자는 깊이를 얻고, 후자는 여전히 표면을 맴돕니다.
무시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가는 길을 압니다. 타인의 인정이 아닌, 자신의 깊은 이유로 행동하기에 세상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묻습니다: "이것이 나를 내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만드는가?" 답이 '예스'라면 계속 갑니다. 타인이 뭐라 하든, 세상이 관심을 주든 안 주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단단함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고요한 자존감'을 얻게 됩니다.
무시를 진정으로 이겨낸 사람은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오히려 고요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자신에게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무시당해도 반응하지 않고 그 에너지를 자신의 집중력으로 돌리며, 비난받아도 평정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독특한 특징을 보입니다:
첫째, 조용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성취를 크게 알리지 않습니다. SNS에 과시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일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찬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방어적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비판해도 즉각적으로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 비판이 타당하다면 수용하고, 타당하지 않다면 무시합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셋째, 선택적입니다. 모든 기회를 잡으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것만 선택합니다. 타인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넷째, 여유가 있습니다. 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긴 호흡으로 삶을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인정받지 못해도, 내년이 있고, 10년 후가 있습니다. 그들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을 뛰고 있습니다.
그 확신은 소리치거나 애써 설명하지 않고, 그저 존재합니다. 마치 산이 자신의 높이를 말로 설명하지 않듯이,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는 마침내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타인의 이해에 기대지 않고, 타인의 승인을 구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길을 가는 것.
결국 무시는 나를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됩니다.
이것은 역설적입니다. 우리는 무시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무시야말로 진정한 나를 찾게 하는 촉매입니다.
인정받을 때 우리는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 합니다. 칭찬받은 부분을 강화하고, 비판받은 부분을 숨기려 합니다. 결국 우리는 '타인이 원하는 나'가 됩니다.
하지만 무시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어차피 아무도 보지 않으니,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아무도 관심 없으니,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이 자유 속에서 진정한 창조가 일어납니다.
세상이 나를 보지 않을 때, 나는 비로소 나를 보게 됩니다. 외부의 소음이 사라지면, 내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정말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에게 진정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이 곧 나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타인의 시선이 없는 그 고요한 공간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만나게 됩니다.
역사를 보면, 위대한 업적들은 종종 무시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반 고흐는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만 팔았습니다. 카프카는 무명으로 죽었습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평생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갔고, 결국 그들의 작품은 영원히 남았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반 고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시가 우리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시는 장애물이 아니라 시험입니다. "너는 정말로 이것을 원하는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할 것인가?"
이 질문에 "예스"라고 답하는 순간, 우리는 단단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외부의 보상 없이도 움직일 수 있는 내적 동기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삶이란, 결국 일상의 구체적인 선택들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월요일 아침, 아무도 보지 않지만 계획한 글을 쓰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왜 그런 것에 시간을 쓰냐"고 물어도, 묵묵히 자신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SNS에서 '좋아요' 숫자를 확인하는 대신, 자신의 진짜 성장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성공 스토리에 부러워하는 대신, 자신의 작은 진보를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난받았을 때 즉각 반응하지 않고, 하루를 쉬며 그 말의 진실성을 가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당한 비판이라면 수용하고, 그렇지 않다면 조용히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기 없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가는 길이 아니라, 내가 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외로워도, 그 길이 느려 보여도, 그것이 나의 길이라면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작은 실패들을 견디는 것입니다. 완벽하지 못한 나를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은 실패했지만, 내일 다시 시도할 것이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단단한 삶이란, 무시를 두려워하지 않고 관심을 구걸하지 않으며, 외로움을 자립의 훈련으로 삼아, 그저 조용히 자기 일을 해내는 삶입니다.
이것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정직한 삶입니다.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면, 당신은 멀리 왔음을 발견합니다. 무시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기에, 비난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았기에, 당신은 결국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깨닫습니다. 진짜 승리는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고.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나는 내가 말한 사람이 되었다고.
이것이 단단함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소란스럽지 않고, 과시하지 않으며, 그저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빛나는 것. 마치 깊은 숲속의 호수처럼, 고요하지만 깊이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울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무시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당신 자신에게 증명했고, 당신 자신으로부터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단단함은 결국, 세상의 승인 없이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