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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섭 Jul 24. 2020

인생 폭우가 닫은 것

커리어 비상행동_마음먹기

저녁 8시가 좀 넘어 일하는 가게 문을 나섰다. 하루 종일 내리던 비는 그칠 듯하다가 더 심해졌다. "가지 말까" 속으로 생각했다. 도서관 말이다. 하루 연체된 책을 인근 도서관에 들러 반납하고 갈 참이었다. 노래 가사처럼 슬픈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 것일까. 문 바로 앞 도시철도로 연결된 지하도를 벗어나지 말아야 했다. 곤경에 처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이미 비를 거슬러 도서관을 향하고 있었다. 올라가는 지하도 계단 아래로 빗물이 흥건히 고여 쏟아졌다. "그냥 하루 좀 더 늦으면 안 되나?" 코로나로 거리두기 기간 중간에 20여 권의 책을 빌려 다 읽는다고 근 1주일을 연체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당시 도서관 착오로 한 달 가까이나 반납 처리가 안 됐다. 이것이 부담이었을까. 괜한 강박인가. 아니면, 다시 열심히 독서 생활을 해보자는 각오였을까. 아무튼 하염없이 쏟아지는 비 사이를 뚫고 도서관 가는 길은 험난했다. 도서관은 일하는 가게와 1km 남짓 떨어져 있었다. 평소 10~20분 산책 삼아 걷던 거리는 물난리가 났다. 몇 십보를 걸었을까. 신발안만 제발 젖지 말자는 바람도 금세 공염불이 되었다. 쏟아지는 굵디 굵은 빗줄기가 행여나 엷어질까 기다려도 봤다. 하지만 채 50수를 세기도 전에 관뒀다. 그럴 기미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젖으면 젖지. 가보자." 호기롭게 다시 길을 재촉했다.


도로에 넘쳐흘러내리는 물에 금방 신발이 젖어왔다. 바지도 밑단부터 핸드폰과 지갑이 든 호주머니까지, 거의 옷 전체가 물에 빠지기라도 한 듯 흠뻑 젖었다. 사방팔방으로 치고 들어오는 빗줄기를 가리기에 우산은 턱없이 작았다. 가방에도 물이 흥건히 튀었다. 빌린 책이 혹시라도 젖지 않을까 걱정됐다. 변상이라도 하게 되면 큰일이었다. 그렇게 물지옥 같이 변한 거리를 지나 겨우 도서관에 도착했다. 도서관 정문은 철재 바리케이트로 굳게 잠겨 있었다. 그 앞 한쪽 옆에 내가 찾던 무인 반납함이 우체통처럼 덩그란히 서있었다. 왠지 낯설었다. 가게 근처 도서관은 시간이 나면 가끔 들리던 곳이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함을 이러저리 더듬어 찾아봐도 책을 넣는 투입구 문은 없었다. 도서 반납대장도 없었다. 꼭 잠긴 자물쇠 키 구멍만 커다랗게 보였다. "아니! XX,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도서관과 반납함 문까지 이렇게 닫아 두면 어쩌란 말인가!" "일과 후 반납 가능한지 전화까지 해서 물어봤는데……." 이때까지 비를 철철 맞으며 미친 것처럼 왔는데, 책을 반납도 못하고 가면 너무 허탈할 것 같았다. 그럴 순 없었다. 도서관 앞마당 입구에 낮게 쳐진 바리케이트로 갔다. 가랑이를 한발 한발 겨우 벌리고 폴짝 뛰어 넘었다. 도서관 건물 출입문 양쪽 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이쪽저쪽 문을 쾅쾅쾅 두드리며 들어갈 방법을 찾아 서성였다. 혹시나 다시 도서관 측에 전화라도 해보려는 찰나, 어떤 한 남자 직원분이 현관문 쪽으로 다급하게 걸어 나왔다.


"무슨 일로 그러시죠?"

"책 반납하러 왔는데 반납함 문이 잠겨서요!"

"어, 그럴 리가 없는데요. 문은 열려 있습니다."

"예?"

"철제함 바로 밑에 보시면 미는 구멍이 있습니다. 그곳에 그냥 책을 넣으면 됩니다."


아뿔싸, 반납함은 평소 그대로였던 것이다. 비 폭탄에 놀랐던가, 뭔가에 홀렸던가. 왜 문이 닫혔다고 생각했을까. 여태 수없이 도서관에 다니며 여러 다른 무인 반납함들을 이용해 왔다. 하지만 이런 폭우 속, 그것도 그토록 힘겹게 나왔지만 일면에 굳게 닫힌 빗장이 내 마음까지도 꼭꼭 잠가버린 것일까. 전혀 작동하지 않을 것 같은, 마치 주문을 외야만 보이는 숨겨진 마법의 문처럼 처음에 보관함 문은 아무리 더듬어도 찾을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은 더욱 험했다. 위안은 책 5권을 비 속에 훌훌 토해낸 가방이 너무 가벼워졌다는 것. 이 험한 물길을 지나 오늘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다는 안도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 빗줄기는 더 거세어졌다. 도로는 거의 홍수가 났다. 하늘은 터져 폭포수 같이 물을 쏟아냈다. 한 치 앞을 보기 힘들었다. 칠흑 같이 캄캄한 어둠과 자욱이 낀 물안개, 인적 끊긴 거리는 마치 모두가 잠든 새벽녘 같았다. 한바탕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 혼자 살아남아 헤매는 느낌이랄까. 천둥번개까지 우르릉 쾅쾅, 정말 살다 살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대폭우였다. 올해 생전 처음 경험한 코로나 사태도 그렇고 요즘 참 희한한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길인지 물인지 모를 거리를 헤치고 드디어 지하철역에 다달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암울한 광경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늘 다니던 조용한 지하철 안 일상 모습으로 바뀌었다. 남은 걱정은 이 상태로 과연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였다. 온통 물을 뒤집어쓴 듯 아래부터 윗 옷까지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찝찝함은 둘째고 사람들 보기에 민망했다. 하지만 어쩌랴.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지하철 안은 바람처럼 평소보다 한적했다. 악몽 같았던 비 덕분이었다. 지하철부터는 줄곳 여유롭게 집까지  수 있었다. 중심가와 평소 사람이 많이 타는 역을 지나갈 때도 내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을까. 내 옆자리가 혹시 옷에서 흐른 물에 젖기라도 했나 봤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아무튼 뭔가 근접할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이었을 거라고 내심 짐작해볼 뿐이다. 그렇게 생판 겪어보지 못했던 비와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하마터면 비는 비대로 맞고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설 뻔한 아찔한 순간을 뒤로 한 채.


그때 도서관 반납함 문을 닫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경험해 보지 못한 장애물, 대홍수 같이 덮쳤던 폭우였나. 아니면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무엇이었던가. 흔한 말로 '일체유심조'라는 단어가 있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것이다. 한편 어설프나마 담을 넘고, 꽉 막힌 문을 두드렸던 절박함은 상황을 바꿨다. 혼돈에 사로잡혀 방황하던 정신을 깨웠다. 요즘 세상은 참 거칠 게 많다. 스스로를 당황케 하는 상황과 위기의 순간을 부지불식간에 만난다. 직장, 사회 생활 속에서 바랐던 모든 기회의 문이 닫힌 듯한 절망을 종종 느낀다. 이럴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쏟아지던 비도 지하철 안의 평온한 풍경까지는 바꿔놓지 못했다. 다시 찾은 여유로운 일상과 죽일 것처럼 퍼붓던 폭우의 거리는 고작 몇 발짝이었다.


집에 와 한숨을 돌리고 보니 호우경보와 뉴스 헤드라인이 떠있었다. 도로 전체가 침수 중이니 가능한 차량 운행 자제하라는 경고에 사망 사고 소식까지, 언급된 지역은 내가 지나온 이었다.


시간당 86㎜ 물폭탄에 만조까지 겹쳐 부산 물난리
부산역 침수 지하철 무정차 운행…동천 등 범람·도로 곳곳 침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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