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수연 Sep 21. 2023

삶은 흐른다. 그러니 아쉬워하지 말자.

만 41세 딩크족에게 아기가 굴러 떨어지다.




어릴 적부터 홍콩을 좋아했다. 장국영을 좋아했고 홍콩 영화를 좋아했다. 홍콩이 가진 감성과 미묘한 색이 좋았다. 화려한 도시 속에 숨겨진 옛 흔적들, 영국과 중국의 문화가 혼재해 있는 모습이 여중생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크다는 홍콩, 마치 안데르센의 잔혹동화 같은 매력이 있다. 



영화 중경삼림 속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음식의 종류는 물론이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한끼에 아무렇지도 않게 10만 원이 넘기도 하고 거의 비슷한 메뉴를 옆 골목에서 만원에 먹을 수도 있다. 선택지가 다양하다는 점은 장점이다. 한곳에서 여러 감성을 동시에 즐길 수 있으니까. 


바다 건너 홍콩섬이 보이는 침사추이의 호텔에서 애프터눈 티를 마시고 있으면 마치 영국 왕족이 된 것 같다가도 홍콩섬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있으면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다. 


승무원 시절, 홍콩 비행을 좋아했다. 



비행기 안에서 국적을 물어보면 홍콩인들은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홍콩 피플이라고 한다. 나는 그 점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중국어와 영어를 모두 잘하는 홍콩 피플. 대륙으로부터 독립해 자주적인 섬나라의 삶을 원하는 홍콩 피플이 좋았다. 


홍콩에 도착한 나는 종종 홀로 나가 침사추이의 거리를 걸었다. 배가 고프면 현지인들이 바글바글한 로컬 식당에서 Roasted goose를 시켜 먹었다. 와인을 잔술로 시키면 작은 잔에 담아주는데 그걸 마시면 천하를 다 얻은 기분이었다. 



홍콩 스타일의 구운 오리, 군침이 도네요.



화려한 쇼핑 거리를 걷다가 난데없이 중국 스러운 디저트를 먹고  재즈 바에 들어가 칵테일을 마셨다. 홍콩의 흔들리는 거리, 항상 축축하고 가끔 비가 내리지만 그마저도 혼탁하니 아름다웠다. 


흔들리는 촛불처럼 불안한 나의 마음을
위로받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래서 홍콩을 자주 여행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좋았다.   


내가 이렇게 홍콩 이야기를 늘어지게 하는 이유가 있다. 태교 여행의 경유지를 홍콩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홍콩에 남편을 꼭 데려가고 싶었기 때문. 단 하루의 체류이지만 남편에게 홍콩의 매력을 보여주기에 넉넉한 시간이어서 기대가 되었다. 


일정은, 

인천 출발 > 홍콩 경유 (1 day) > 발리 도착
발리 8 day 
발리 출발 > 홍콩 경유 > 인천 도착  



그런데 웬걸, 출발 전날 항공사로부터 충격적인 문자가 도착했다. 태풍으로 홍콩에서 발리 가는 티켓이 취소된 것이다. 항공사에서는 우리에게 두가지 대안을 주었는데,


1안 : 첫날 대체편인 대한항공을 타고 (7h) 발리로 직행 

2안 : 홍콩에서 3일 체류 후, 발리로 출발 


임산부에게 7시간 비행도 무리였지만 홍콩을 포기할 수 없았다. 그래서 2번째 대안을 선택했다. 홍콩에서 3일간 묶을 호텔을 급하게 예약하고 불안하지만 부푼 마음을 안고 홍콩으로 출발했다. 



남편과 함께 간 홍콩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홍콩은 죄가 없다. 다만, 내가 달라졌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홍콩 거리에서 낭만을 즐기며 와인을 잔술로 마셨던 나는 이제 없다. 내 옆에는 듬직한 남편이 있고 배속에는 내가 책임져야 할 자식이 있다. 길거리 망고주스를 마시며 하염없이 걸어도 좋았던 나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입덧때문에 홍콩의 음식도 내게 큰 만족을 주지 못했다. 내가 사랑했던 자질구레한 일정들이 빠지고 나니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우리는 별 목적도 없이 거리를 걷다가 곧 할 일이 없어져 호텔로 돌아왔다. 의기소침하게 있다가 잠이 들었다. 


이제 홍콩은 다시 올 일이 없겠구나 하는 마음에 교통카드도 반납해 버렸다. 예전 같으면 그대로 가져왔을 것이다. 



모든 삶은 흐른다.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홍콩을 경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크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출산 후 달라질 삶을 체험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흘러가는 것은 흘려보내야 새로운 것이 온다. 

나에게 새로운 삶이 온다.


무엇이 더 즐거워 질까? 

무엇을 더 좋아하게 될까? 



이전 이야기: 불행한 임산부의 남편이 가진 5가지 특징불행한 임산부의 남편 5가지 특징 불행한 임산부의 남편 5가지 특징


이전 18화 딩크의 삶 vs 아기가 있는 삶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