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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Oct 30. 2020

로브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눈물

최고의 2인자, 앤디 머리의 눈물

6. 로브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눈물

로브 : 공을 높이 올리는 것을 말하며, 상대편의 강한 스트로크를 억지로 받아 올리는 방어적인 로브와 네트에 가까이 다가선 상대편의 키를 넘기는 의도적인 공격적 로브가 있다.

내가 가장 열광하는 선수는 라파엘 나달이다. 엄청난 회전량의 포핸드 스트로크를 무기로 코트 구석구석을 누비는 모습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공 하나하나 죽을힘을 다해 치는 열정과 에너지는 공 속도가 다소 느린 클레이 코트, 특히 프랑스 오픈에서 빛난다. 나달의 통산 프랑스 오픈 우승은 무려 13번이다. 메이저 대회(US오픈, 윔블던, 호주오픈, 프랑스 오픈)를 통틀어도 가장 압도적인 기록이며, 결승에선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2020년 프랑스 오픈에서도 숙적 조코비치를 결승에서 무실세트로 이기며 그랜드슬램 20회 우승, 프랑스오픈 통산 100승을 달성했다. 나달의 별명 '흙신'은 지극히 당연한 호칭이다. 내가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선수는 로저 페더러다. 페더러의 그랜드슬램 대회 20회 우승 기록은 2020년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메이저대회 우승 : 나달 20회, 조코비치 17회) 게다가 237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우승컵을 싹쓸이하던 폭발적인 전성기뿐 아니라,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상대를 요리하는 최근 모습을 보면 페더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것 같다. 포핸드, 백핸드, 발리, 서브, 로브 등 페더러의 모든 기술이 테니스 교본에 단골처럼 등장하며, 특히 우아한 원핸드 백핸드 스트로크는 '테니스 황제'의 위엄이 응축된 기술이다. 페더러는 스위스 기념주화의 모델이 되었고, 2020년 포브스가 선정한 스포츠 스타 수입 1등도 차지했다. 한편, 내가 가장 마음이 쓰이는 선수는 뜬금없지만 앤디 머리다. 

우리는 '페-나-조' 시대가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영원히. (출처 : statista)


테니스 팬들은 '페-나-조(페더러-나달-조코비치)' 시대에 영원히 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면서 기대하고 있다. 

세 선수의 우승 횟수, 압도적인 경기력, 20대보다 강력한 체력을 보자면 '독보적'이라는 단어도 부족할 지경이다. 프로테니스협회(ATP)는 2017년 21세 이하 선수들 중 8명을 모아 넥젠 파이널 대회를 만들고, 빅 3의 아성을 무너뜨릴 신성을 찾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 (넥젠 파이널 초대 챔피언은 한국의 정현이다.) 이런 장기 집권 시대에 메이저 대회 3회 우승에 빛나는 선수가 앤디 머리다. 머리는 프레디 페리 이후 77년 만에 영국인의 윔블던 우승 기록을 세웠고, 나라를 대표해 올림픽에서 2회 연속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영국 테니스의 희망으로 불리며 한때 빅4로 불리기도 했고,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 하지만 앤디 머리는 유독 2인자 이미지가 강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수비형 테니스로 승승장구하며 그랜드슬램 결승전에 올라가도 멘털이 무너지며 준우승만 8번 차지했다. (특히 호주 오픈 결승에서만 조코비치에게 4번이나 패했다. 최악의 상성이다.) 그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더블 폴트와 어이없는 실수로 허무하게 경기를 망치기 일쑤였다. 관중이나 심판을 향해 거칠게 소리치고, 상대 선수가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팬들은 앤디 머리를 향해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동정심과 함께 새가슴, 과대평가란 조롱을 날리곤 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앤디 머리는 조금 달랐다.


 통증이 멈추지 않는다면 계속 테니스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종점이 필요하다. 
윔블던은 내가 마지막으로 뛰고 싶은 무대이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 앤디 머리


기자회견 장에서 눈물을 흘린 앤디 머리 (출처 : Scott Barbour / Getty Images)


상대를 잡아먹을 기세로 소리를 치고,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프로들에게 '눈물'은 다소 어울리지 않다. 그나마 익숙한 장면은 승자가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다. 성취감, 희열, 환희, 감사, 뿌듯함. 여러 감정이 뒤섞인 채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면 관중도 모두 하나가 되어 박수를 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2019년 1월 호주오픈 기자회견에서 앤디 머리는 우승 인터뷰도 아닌데 눈물을 흘렸다. 2017년 부상 이후 1년 가까이 재활에 매달린 머리는 복귀 이후에 예전 기량을 펼치지 못하며 까마득한 200위권 밖으로 떨어졌다. 그는 컨디션을 묻는 질문에 좋지 않다고 대답한 뒤 한참을 울먹거렸다. 결국 잠시 기자회견장을 떠나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인터뷰를 진행했다. 고관절 부상으로 통증이 계속되어 예전처럼 테니스를 즐기지 못할 것 같다며, 올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상징인 윔블던까지 뛰고 싶지만 몸상태를 확신할 수 없다며 중간중간 눈물을 닦으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의외의 눈물에 나는 공감하며 그에게 마음이 끌렸다. 앤디 머리는 항상 1인자를 따라가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실제 테니스의 정상까지 올랐다. 승리가 전부인 스포츠 세계에서 그의 눈물은 그저 패배의 아쉬움만은 아니다. 스포츠 선수에게 가장 가혹하고 절망적인 재활을 이겨낸 후련함, 묵묵히 자신을 믿어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 수고한 자기 자신을 향한 묘한 감정이 뒤섞인 게 바로 그 눈물일 것이다.


앤디 머리의 결정적 샷은 2015년 데이비스컵 '로브'였다. 그는 국가대항전 결승전 챔피언십 포인트를 절묘하게 상대의 키를 넘기는 로브로 결정지었다. 대회 중 단복식 합쳐 무려 12경기에 나와 11승을 거뒀고, 79년 만에 영국에 우승컵을 선물했다. 대체로 로브는 상대방이 네트를 먼저 점령한 불리한 상황에서 나오는 샷이다. 한때 한 선배는 로브는 비겁하게 피하는 기술이고, 무조건 강하게 패싱샷으로 뚫어야 한다고 가르쳐줬다. 그렇지만 나는 인간적인 앤디 머리처럼 눈물 흘리며 슬픔을 받아들이고, 수세에 몰렸다면 그걸 인정하고 돌아가는 로브가 인생에도 필요하다고 느낀다. 넘어오는 모든 공을 화려하고 호쾌한 위너로 꽂을 수 없고, 빈 공간으로 친다는 건 비겁한 도망이 아니다. 인생의 모든 상황도 우리에게 항상 유리할 수만은 없고, 우리 모두 한낱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항상 약해지지 말라고, 긍정의 힘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슬픔과 눈물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본다. 하지만 인간은 슬픔을 이겨내는 힘을 통해 한 뼘 성장한다. 역설적으로 슬픔을 이겨내는 힘 역시 결국 '슬픔'에서 나오며, 그걸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앤디 머리는 테니스를 사랑하고, 나도 감정에 솔직한 그의 테니스를 사랑한다. 나도 여러 감정이 뒤섞인 진한 눈물을 흘릴 때까지, 설사 흘리더라도 외면하지 않고 진심을 다해 인생을 살아야겠다. 때때로 로브를 뒤섞어 공이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 잠시나마 한숨 돌리면서 말이다.


넘어지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면 넘어지는 것은 괜찮다.
그들을 이기기 위해 항상 모든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한다.
모든 패배에서도 배워간다.
- 앤디 머리


+ 앤디 머리는 결국 은퇴하지 않았고, 2020 US오픈에서 단식 1회전에서 4시간 39분 혈전 끝에 승리를 거뒀다. 2년 만에 따낸 극적인 메이저 대회 단식경기 승리였다. 그의 테니스 인생은 현재 진행 중이다.


상해 여행 중 만난 반가운 앤디 머리의 앳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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