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만남, 예고 없이 찾아온 다정함

약속하지 않은 채 갑자기 만나자고 해도 즐겁고 편한 사람이 있다. MBTI에서 J형들은 이런 즉흥적인 약속을 부담스러워한다고 한다. 미리 계획하고, 시간을 정하고, 준비된 만남을 더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조금 다른 쪽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약속을 정해두고 만나는 것도 좋다. 날짜를 잡고, 시간을 맞추고, 그날을 기다리는 설렘도 분명 있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런 예고 없이

“지금 시간 돼?”

라는 한마디로 시작되는 만남이 이상하게 더 반갑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마치 서로 마음의 타이밍이 맞아 조용히 신호를 주고받은 것처럼,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느낌. 그날의 기분과 그 사람의 마음이 우연히 같은 방향에 놓인 순간. 그래서인지 그런 즉석 번개만남은 계획된 약속보다 더 가볍고, 그래서 더 편안하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아도 괜찮고, 옷차림이나 표정을 점검하지 않아도 괜찮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저 짧은 연락 한 통만으로도 마음이 슬며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잠깐 커피라도 마실까요?”

그 한마디에 망설임보다 먼저 반가움이 올라오는 관계. 생각해 보면 그런 만남은 살면서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오래된 관계가 좋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많이 쌓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관계가 깊고 편안할 거라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어도 만나기 전부터 괜히 마음이 피곤해지는 사람이 있고, 짧게 알게 되었어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 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고, 굳이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내 마음의 결을 알아주는 듯한 사람.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까움은 시간의 길이보다 함께 있을 때 마음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편한 사람과의 만남은 특별한 준비가 필요 없다.


무언가를 잘 보여주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려 애써 꾸미지 않아도 된다. 조금 피곤한 얼굴이어도 괜찮고, 조금 엉뚱한 말을 해도 괜찮고, 말끝이 정리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 사람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먼저 놓인다. 웃음을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되고, 침묵마저 불편하지 않다. 잠깐 차 한잔을 마시는 시간도 좋고, 길지 않은 대화 속에서도 마음 한쪽이 환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 만남은 단지 시간을 보내는 일이 아니다. 하루의 결을 조금 부드럽게 바꾸어 주는 일이고, 삶이 아직 따뜻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모임에서 알게 된, 너무 예쁘고 키도 크고 세련된 분이 있다.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괜히 말을 섞기가 어려웠다. 나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몇 달 전,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몇 마디의 대화 속에서 '오? 이분 나랑 비슷한 면이 많네? 친해지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 이후 몇 번 만나 밥을 함께 먹고 차도 마시고, 통화도 가끔 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알게 된다. 누군가를 많이 아는 것보다 나와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 사람이 많은 것보다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친구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좋다. 관계에 꼭 정해진 명칭이 없어도 괜찮다. 나와 결이 맞고, 성향이 맞고, 대화의 온도가 비슷한 사람. 함께 있으면 내가 조금 더 나다워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큰 행운이다.


오늘도 별다른 예고 없이 찾아오는 반가움이었다. 별다른 계획도 없이 시작되었지만 정해진 약속보다 더 반갑고, 준비된 자리보다 더 따뜻한 순간이었다. 근처 맛있는 빵집을 찾아 커피를 마셨다. 이런저런 공통사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답답한 속내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를 이해해 주는 눈빛과 말투가 편안했다. 말을 나누고 웃고 함께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그런데도 마음은 오래 따뜻했다.

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일이구나.

애쓰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인연,

잠깐의 만남조차 좋은 시간으로 남게 하는 사람,

그런 존재는 생각보다 더 소중하구나.


살면서 누구를 만나는가는 어쩌면 삶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를 지치게 하는 관계도 있지만, 반대로 잠깐의 만남만으로도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관계도 있다. 편안한 번개만남 속에서 잘 맞는 사람과의 인연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지 다시 느꼈다. 말을 고르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가 닿는 사람에게서 예고 없이 찾아온 다정함은 어쩌면 일상의 삶이 건네는 기분 좋은 깜짝 선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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