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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베이킹랩 이성규 Jul 29. 2020

바빌로프와 보로딘스키

내가 러시아로 가고자 한 이유

러시아를 찾은 2018년 여름, 한국엔 유례없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기온이 40도를 넘나들던 한여름, 나는 러시아의 파란 하늘과 서늘함을 즐기고 있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우연히 바실리라는 러시아 친구를 알게 되었다. 그는 니즈니 노브고로드라는 도시에서 밀농사를 짓고 맷돌 제분기로 밀가루를 내어 화덕에서 빵을 굽는다. 그의 페이스북 피드를 보면서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2018년 봄 그의 동네에 놀러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ok 사인을 보내왔고, 난 일찌감치 모스크바를 경유해 그의 도시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여름이 오기만 기다렸다.


바실리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긴 했지만 내가 러시아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바빌로프가 그 첫 번째 이유이다.


밀에 대한 공부를 위해 이 자료 저 자료를 뒤적이다 바빌로프를 알게 되었다. 바빌로프는 20세기에 가장 뛰어난 식물 육종학자이자 유전학자로 평가되는 러시아의 농학자이다.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그는 작물의 재배종이 기원지를 중심으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중동, 아프리카, 지중해, 아메리카 대륙, 동아시아로 총 100번의 수집 여행을 떠났고, 여행을 통해 10,000종 250,000 점의 종자와 식물 표본을 수집하였다. 


그는 1929년 10월부터 12월 말까지 일본, 대만, 한국을 방문하였다. 일본을 거쳐 대만으로, 대만에서 배로 한국에 들어왔고, 12월 말 한국 국경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아마도 1929년 12월에 한반도를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는 수집 여행을 했을 것이다. 그는 Five Continents이란 책에 종자 수집 여행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아쉽게도 한반도의 식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제한적이며 그나마 인삼, 콩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이다. 1929년 12월 말 한반도를 떠나는 바빌로프에게는 일본, 대만, 한국에서 수집한 3,500kg에 달하는 씨앗과 식물표본이 들려있었다. 이중 한반도에서 수집한 재배종과 야생종 콩 종자에 상당수 들어 있었을 것이다. 


종자 수집 여행에서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바빌로프는 8개 지역을 재배종 기원지로 설정하였다. 중국, 일본, 한국이 속한 동아시아도 그중 하나이다. 동아시아는 콩, 조, 다양한 종의 채소와 과일 종의 기원지로 전 세계 재배종의 20%가 여기서 기원했다고 하였다. 동아시아의 재배종에 대해 바빌로프가 남긴 평가 중 내 주의를 끈 건 단연 밀에 대한 평가다.


Chinese culture under the peculiar conditions of the monsoon climate had altered the imported wheat and barley forms for thousands of years and created its own unique subspecies.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밀과 보리는 수천 년간 몬순기후의 영향으로 지역 고유의 변종이 생겨났다.


20세기 초에 작성된 바빌로프의 종자 수집 기록에서 당시 한반도에서 재배되던 밀에 대한 기록을 찾으려는 시도는 별 성과 없이 끝났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한반도를 떠났던 3,500kg에 달하는 씨앗과 식물표본에는 밀도 들어 있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바빌로프의 수집품은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 VIR(All-Russian Research Institute of Plant Industry named after V.I. N.I. Vavilov)이라는 연구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VIR은 스탈린에 의해 처형되기 전까지 바빌로프가 소장으로 있던 식물연구소이다. 기회가 된다면 이 연구소를 찾아 바빌로프가 수집했던 밀을 보고 싶었다.


보로딘스키 빵, 러시아를 가고 싶었던 두 번째 이유이다.

나는 스토리를 무척 좋아한다. 당시 운영하던 아쥬드블레라는 빵집에 스토리를 담고 싶었고, 그 빵집에서 만들어 팔던 빵에도 스토리를 입히고 싶었다. 스토리를 스스로 만들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선 이미 잘 만들어진 매력적인 스토리를 가져다 쓰는 게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보로딘스키 빵은 항상 내 위시리스트 최상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이 빵을 만난 건 곽지원빵공방에서 유럽 빵집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모스크바에서였다. 당시에도 러시아의 흑빵에 대해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게 어떤 빵인지 알지 못했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짐가방 한 귀퉁이에 비닐에 쌓인 벽돌처럼 생긴 검은 빵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디서 샀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무심히 비닐을 뜯자 빵 봉지에서 새어 나오는 향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달콤했다. 얼른 빵 칼을 챙겨 와 빵을 써는 사이 향은 거실에 진동했다. 빵 한 조각을 급히 집어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달큰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호밀빵이라는데 이런 맛과 향이라니... 


몇 조각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급하게 웹 검색에 들어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빵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빵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영어권에선 러시아 빵이 대중적이 않으니 제대로 된 영문 자료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우연히 세르게이 선생의 블로그를 알게 되었다. 수만 명이 팔로우하는 선생의 블로그는 러시아 빵의 보고였다. 물론 보로딘스키 빵에 대한 좋은 정보도 있었다. 문제는 러시아어였다.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선생의 블로그 글을 열독 하였다. 번역이 황당하게 되는 부분도 적지 않았지만 대략적인 정보를 얻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글을 읽어갈수록 이 빵을 꼭 구워보고 싶다는 열망은 커져갔다. 하지만 쉽게 엄두가 나진 않았다.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재료도 있었고, 그때까지 내가 알던 제빵 방식과 다른 점이 많아서 내가 한다고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래 세르게이 선생을 찾아가 직접 배워야겠다!


그렇게 나는 러시아에 가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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