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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베이킹랩 이성규 Aug 03. 2020

여기 와서 밀 농사 같이 지어볼래?

러시아로 초대해준 바실리가 사는 동네는 푸체즈라는 조그만 시골마을이다.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러시아의 젖줄인 볼가강을 따라 차로 두 시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바실리는 푸체즈에서 밀농사를 크게 짓고 있는 바질라프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의 밀밭은 차로 돌아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우리 땅에서는 상상할 수 없이 큰 규모였다. 그 면적이 600만 평, 여의도 면적의 두 배가 넘는다. 그는 세 대의 트랙터와 두 대의 그라스 컴바인으로 밀밭을 관리하고 있다.

내가 푸체즈에 도착했을 때는 밀 수확이 한창이었다. 두 대의 콤바인이 하루 20시간 그 넓은 밀밭의 밀을 수확하고 있었다. 바질라프의 밭에서 자라고 있는 밀, 스펠트는 반왜성화된 육종된 종자였고 심지어 호밀도 키가 작은 품종이었다. 

바질라프가 내어준 자신의 별채에 머물며 나는 두 차례 바질라프와 밀농사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푸체즈에 도착한 첫날과 세째날. 첫 번째 토론은 내가 묻고 바질라프가 답하는 형식이었고, 두 번째는 내가 의견을 내고 바질라프가 질문하는 형식이었다. 첫 번째 토론에선 나는 그의 밀 품종과 밀농사 법에 대해 주로 질문하였다. 바질라프는 최소 경운, 무농약, 무화학비료를 근간으로 하는 자신의 밀농사 법을 설명해 주었다. 농장 운영과 유기농밀 판매 방식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특히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은 기후 특성상 재배 기간이 짧아 밀을 일모작 한다는 것과 수확과 거의 동시에 종자를 파종하는 농사법이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 토론에서 나는 밀의 분얼을 늘리는 방법을 소개하였다. 분얼은 식물이 성장하면서 포기가 늘어가는 현상으로 씨앗을 최대한 늘려 종족보존을 추구하는 벼과 식물의 특징이다.



밀 분얼(왼쪽은 내 밀밭, 오른쪽이 바질라프의 밀밭)

논의를 위해 내가 보여준 두 장의 사진이다. 왼쪽이 내 밭의 밀 사진이고 오른쪽이 바질라프 밭의 밀 사진이다. 이 사진 두 장에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잘 나타나 있다.


난 모든 밀밭의 밀이 왼쪽 사진처럼 분얼이 많이 되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운영하던 아쥬드블레에 앉은뱅이밀을 대주시는 공주 황진웅 선생 밭의 밀도 바질라프의 밀과 다르지 않았다. 포기 수가 서너 개인 것이 보통이고, 심지어 하나인 것도 적지 않았다. 포기가 하나뿐이라면 이삭에 대개 10여 개의 알곡이 맺히니 씨앗 하나 심어 밀알 10여 개를 얻는 셈이다. 거기다 수확과 알곡 처리과정에서의 발생하는 손실을 생각하면 실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양은 더 줄어든다.


바질라프 밀밭의 평균 수확량은 2~3톤/ha, 평당 0.8~1kg 수준이다. 황진웅 선생은 평당 1~1.5kg의 수확을 거두니 바질라프 밀밭의 수확량은 낮은 편이다. 미국 밀 곡창지대의 평균 수확량도 바질라프 밀밭의 수확량 수준이다. 그러니 그곳의 밀 분얼도 대개 비슷한 수준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농부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수확량을 늘리는 것이다. 밀 농부의 목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밀 수확량을 높이는 방법은 크게 1. 작물 잘 키우기, 2. 수확 시 손실 줄이기, 3. 수확 후 정선시 손실 줄이기 등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을 테고 2와 3은 효율이 좋은 장비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다.


지난 몇 년간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밀농사를 지으면서 고민하고 연구해 온 것 중 하나가 건강한 방법으로 작물을 잘 키워 수확량 늘리기이다. 이런저런 자료를 통해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흙을 기름지게 하기


다른 하나는 분얼을 많이 일어나게 하기


바질라프에게 소개한 내용은 분얼에 관한 것이었다. 밀과 호밀 같은 벼과 식물은 생장점이 꺾이면 옆에서 새로운 줄기를 올리는 특성이 있다. 장마철 전후로 밭에 걷잡을 수 없이 자라는 돌피를 낫으로 베고 나서 며칠 후 밭에 가보면 더 많은 포기로 더 무성해진 녀석을 볼 수 있다. 사실 밀과 호밀도 돌피와 다를 바가 없다. 생장점을 자르거나 밟아주면 포기가 는다. 포기가 늘어나는 것을 분얼이라고 한다.


이런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던 우리 선조들은 늦은 겨울에서 이른 봄에 이르는 시기에 밀싹 밟기를 하였다. 서리가 허옇게 내린 밀밭 위를 뒷짐 지고 산책하듯 걸었다. 그 신발 아래로 서리에 언 밀싹들은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허리가 구겨졌다. 추운 겨울을 어렵게 난 어린 밀싹에게 몹쓸 짓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땅이 녹고 기온이 올라가면 밀들은 오히려 포기가 무성하게 자랐다.


밀싹 밟기가 분얼을 촉진한 것이다.


분얼에 대한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찾다 일본의 사례를 발견했다. 일본의 한 밀 농부가 트랙터에 연결한 롤러로 밀싹 밟기를 한다. 그는 이른 봄까지 10여 차례 밀싹 밟기를 한다고 한다. 숫자가 기억나진 않지만 수확량이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에서는 초봄까지 가축을 밀밭에 풀어놓아 밀 싹을 뜯어먹게 하기도 한다.


밀싹 밟기를 소개하니 바질라프는 상당한 관심을 보이며 마침 비슷하게 생긴 롤러도 있으니 이듬해 봄에 200평 밭에서 한번 시험해 보겠단다. 그리고 그 결과도 알려주겠단다. 나는 아직도 그의 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두 번째 토론 끝자락에 바질라프가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너 여기 와서 밀농사 같이 지어볼래?


난 지금도 종종 끝없이 펼쳐진 푸체즈의 황금빛 밀밭을 오가는 콤바인 위에 올라 밀을 베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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