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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희 Oct 21. 2024

환하게 머묾



집을 두고 가는 길

몇 달에 한 번 나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간다. 지방에서 상경해서 한 이십몇 년간 홍대 인근에서 살았다. 산 세월로 따지면 홍대 근처의 서교동, 연남동이 고향이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신촌도 그 인근이라 거리며 건물이며 공기가 참 익숙하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강화도로 향하는 차 안에서 막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빛에 눈이 부셔 미간을 찡그리며 바라본 마포구의 거리는 어쩐지 뭉클하고 짠하다. 이제 그 거리 어딘가에 내가 머물던 숱한 집들은 없지만, 집을 두고 떠나가는 기분이 든다. 한강 다리를 건널 때쯤에는 진한 주황색의 햇빛이 강물의 표면에서 산란하고, 내 마음도 싱숭생숭하다. 내가 운전하는 차는 지평선에 걸린 태양을 향해 서쪽으로 달린다. 나는 그곳을 떠났지만, 온전히 떠나지 못한 것 같다. 이제 내가 없는, 내가 아끼는 사람 몇이 사는 정겹던 동네는 등 뒤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그곳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옮겨 가서 다행이라 여기며 액셀을 지그시 밟는다. 




집으로 가는 길

이삼일에 한 번 강화읍에 있는 하나로 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 로컬 푸드 판매대가 생긴 후로는 그곳을 주로 이용한다. 강화에서 농사지은 신선한 채소와 과일과 버섯을 언제나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살 수 있어 무척 마음에 든다. 장을 보고 집으로 향할 때는 마트로 갈 때보다 먼 길로 돌아간다. 차 창을 열고 녹색 시골 풍경 사이로 천천히 차를 달리면, 제법 센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고 목덜미를 스쳐 지나간다. 어느덧 제법 차가워진 바람이 시골 내음을 실어 와서 주책없이 나는 마음이 뭉클해진다. 몹시 투명한 가을 햇살이 사선을 그리며 키 큰 나무의 무성한 녹색 잎사귀에 이르러 반짝거린다. 내 촌집에 다다를 때쯤이면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벼가 넘실대는 논이 끝나지 않을 듯이 펼쳐진다. 집으로 가는 길은 계절에 따라 늘 다채롭다. 시골로 옮아앉기로 결심했던 몇 년 전의 내게 잘했다며 칭찬해 주고 싶어 괜히 으쓱해진다. 



환하게 머묾

햇볕이 가득 찬 촌집 마당에는 매일 돌봐주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땅에 단단하게 뿌리내린 식물과 내 촌집 근처 어딘가에 터를 잡은 촌냥이 세 마리다. 이들을 돌볼 때면 마음에 작고 사소한 행복의 파문이 서서히 번져온다. 손길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까칠한 고양이 셋은 밥때가 되면 나만 바라본다. 밥 달라는 가냘플 울음소리와 내게 고정된 반짝이는 눈동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일상을 환하게 일렁이게 하고 영롱하게 빛나게까지 한다. 

  


떠나려 머묾

사 년째 이 촌집에 머무는 나는 깊게 뿌리내려 정착하지는 않았다. 삶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이라고 했던 세네카의 말을 떠올리며 내 삶에 조금 다르게 적용해 본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집은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한동안 잠깐 머물다 떠나는 곳이다. 나는 이 집에서 조금 오래 머무르려고 한다. 백 년 전의 베일을 다 벗겨낼 때까지. 휘청일 때 단단히 붙잡고 버틸 수 있도록 나무 몇 그루도 더 심으려고 한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도록 애지중지 가꿀 것이다. 


언젠가 황량하고 외떨어진 집터를 만나면 고생해서 가꾼 것들은 모두 두고 터벅터벅 걸어가려고 한다. 그 여정에서 예상치 못한 맞바람이 거세게 몰아칠지도 모른다. 그때 주체하지 못해, 가진 것들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산산이 흩어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것만 소유하려고 한다. 걷다가 힘에 겨워 주저않지 않도록 간소하게 짐을 챙겨 길을 나설 것이다. 내내 햇볕이 가득하게 비쳐 드는 자그마한 집을 찾아서.


이 촌집에 머무르는 지금은 틈틈이 집수리하면서, 내 사랑 중간이와 보통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면서 소소하게 잘 살아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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