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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언화가 Apr 02. 2021

할아버지의 꿈

내가 꼭 필요하던 그 순간을 추억하며

한 달 전, 근무지가 바뀌며 시골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사는 곳이 바뀌게 되면서 내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로서 직업적인 변화는 없었지만, 일상 생활 속에서의 작은 변화들은 잔잔하게 쌓였다.


가장 변화는 주말의 일상이었다. 도시에서의 주말은 무언가를 배우거나 지인과의 약속으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하지만 교통편이 좋지 않은 시골에서의 일상은 도시에서 누리던 것들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의도하지 않은 변화였으나 도시의 바쁨이 차지하던 대부분을 시골의 여유가 대체하게 되었다.


지난 주말도 내게는 48시간이라는 오랜 여유의 시간이 주어졌다. 여유를 넘어 지루한 주말이라는 생각까지 들 때쯤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찌뿌둥해진 몸을 이끌고 집 앞에 있는 학교로 향했다. 집을 나서며, 학교 운동장을 한 바퀴라도 돌아볼 생각이었으나 게을러진 몸은 학교 옆 벤치를 보자마자 엉덩이부터 들이미는 것이었다. 일단 앉고나니 일어나기 싫은 게 사람의 습성이라, 운동장을 돌겠다는 마음은 접어두고 눈으로만 한가한 일요일 오후의 빈 운동장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트로트 음악.

음악의 정체는 할아버지의 주머니였다. 볼륨을 크게 키운 작은 오디오를 주머니에 넣은 채, 노부부가 운동장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걸음걸이를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어그적어그적이라고 해도 될 것 같고 뒤뚱뒤뚱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당장에 운동장으로 갈 것 같았던 두 분이 벤치의 이끌림을 받은 것인지 내 옆자리에 앉으셨다.


시골에 살면서 생긴 습관은 모르는 어른이라도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건넨다는 것. 나도 모르게 '안녕하세요' 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갔다. 노부부는 두 눈을 깜빡거리시며  새롭게 생긴 말동무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건네셨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에 대한 답례로 눈빛 대신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 보이는 저 집으로 이사를 왔노라며 나를 소개하자 '그런 거였군'이라는 깨달음의 표정이 노부부의 얼굴을 동시에 스쳐갔다. 그리고 이어진 할아버지의  TMI (Too Much Information)이야기. 자신은 이 곳의 면사무소에서 일을 하다가 퇴직하셨다고 한다.


늘 학교 운동장을 도는데, 오늘은 오전에 날이 흐려서 밖에 나오지 못했다가 오후가 되어 날이 개었기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 이야기를 듣자니 꽤나 재미있어진다. 딱히 오후의 약속이나 해야할 무언가도 없기에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귀기울여 들었다. 나의 경청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인 걸까, 할아버지는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들까지 속속들이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할머니 역시 나와 같은 또 한 명의 청중이 되어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셨다.


그렇게 1시간 남짓 이어진 대화의 끝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로 맺었다. 그 시절은 무엇을 의미하냐는 물음에 할아버지는 아련해지는 표정으로 답한다. "내가 꼭 필요했었던 그 시간, 그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잠시 정적이 흐르고, 할머니는 분위기를 바꾸시려는지 할아버지를 재촉해 운동장을 돌자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재촉에 할아버지는 의자에서 일어나 운동장으로 향하셨다. 멀어져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꼭 필요했었던 시간."


직장 생활을 하며, 지치고 힘들 때면 벗었나고 싶었던 나의 쓸모였는데 할아버지의 아련한 눈빛을 보며 내가 누리는 이 불평과 불만이 어쩌면 큰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내가 꼭 필요했었던 시간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해 나는 내가 꼭 필요한 시간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지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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