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아 마땅한 날

by 그냥사탕


저녁을 준비하기 위하여 장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한여름 같았으면 저녁 8시가 넘어도 한 낯처럼 밝았을 시간. 어느덧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5시만 넘어도 어느새 '뉘엿뉘엿'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하늘의 모습이 된다.


집에서 나온 지 고작 몇 분. TV 보며 엄마를 기다리는 꼬맹이들이 생각난다. 더욱 깜깜해지기 전에 양파라도 사서 돌아가기 위해 짧은 다리를 재촉했다. 마침 저 멀리서 신호등의 초록불이 보였다. 순간 내면에서 끌어올린 에너지를 이용해 전력질주를 해 보았으나 달리기에 약한 나의 신체는 성급히 붉은색으로 바뀌는 신호등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넓지도 않은 도로. 사람도 별로 없는데 후딱 넘어갈까?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들린다. 그러나 위치는 초등학교 앞이었다. 내 눈에 안 보여도 어디선가 지켜보는 작은 눈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 게다가 아이 키우는 입장으로서 모범까지는 아니어도 해서는 안 될 일을 잘 알고 있다. 고작 2~3분 먼저 가려다 더 많은 것들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기에.


길어야 딱 3분 내외.

기다리는 동안 머릿속은 다양한 주제로 복잡해진다. 주로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이다. 그렇기에 한 번 빠지면 점점 가라앉게 된다. 서둘러 머리 안에 잡다한 단어들을 빗질하듯이 쓸어 담아 훌훌 털어본다.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늘을 보았고, 예상치 못한 한 폭의 명화를 마주했다.



멀리서 보이는 산 뒤쪽에 해가 있는 시간인지 역광으로 까맣게 보였다. 그 위에 점점이 몰려있는 구름의 물결이 강물 흐르듯 끝없이 이어진다. 분명 원래 색은 화이트였을진대 빛을 반사하며 붉게 물든 모습이 길가에 떨어져 있는 단풍 낙엽들의 모임처럼 보인다. 정작 빨강의 원인인 태양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말이다.


어쩌면 인간들의 퇴근 시간에 맞춰 태양 또한 집에 가는가 보다. 아침에 기상시간에 맞춰 출근하셨다가 하루를 밝게 비추느라 에너지 다 소진하신 분. 혹여 누가 붙잡고 야근이라도 시킬까 봐 하얗고 붉은 구름 방귀 뿡뿡거리며 피곤한 몸덩이를 이끌고 부리나케 퇴근길에 오른 모습이다. 과연 해님의 오늘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기분일까?


야채가게에서 양파와 두부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왔던 길에 다시 올랐다. 하지만 급하게 퇴근하는 해를 마주하며 굳이 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리 감성적인 사람이 아닐진대 점점 멀어지는 태양의 방귀 흔적을 보며 새로운 생각에 잠긴다.


'나의 오늘은 어떠했을까?'


어릴 적 읽었던 어떤 만화책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지는 해의 색은 낮동안 해가 가장 많이 본 것을 알려주는 것이래"

몇 십 년이나 지난 일이기에 정확한 대사는 아니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만화책이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기에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린 시절 마루에서 배 깔고 읽다가 꽤나 각인이 되었나 보다.


그렇다면 내가 본 빨간 뿡뿡이는 오늘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기분일까?

아마도 곳곳에 피어있는 단풍잎을 보았나 보다. 그래서 덩달아 기분 좋게 퇴근하나 보다. 퇴근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일테니 말이다.

속으로 연달아 솔로 만담처럼 되뇌다가 나의 오늘을 떠올린다.


'나는 오늘 무엇을 보았지?'

'나의 오늘은 기분이 어땠을까?'


분명 같은 하루를 살았는데 막상 떠올리니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가정주부이기에 회사로 출퇴근할 일도 없고 아이들 각자 가야 할 곳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저녁에는 식사 준비와 책을 읽어주다 또 이렇게 잠자리에 들겠지. 매일 같은 루틴이기에 특별한 곳이 어디 하나 없었다. 그런데 굳이 매일 다를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꿈꾸는 매일 다른 날을 실제로 겪는다면 그건 판타지 속 주인공이다. 그리고 에너지 고갈로 며칠 못 가서 앓아누울 수도 있다. 드라마나 소설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특별한 어느 날에 국한되어 예쁘게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이야기 속에서도 위기는 존재한다. 병마와 싸우던가 심각한 사건이나 사고가 벌어진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역경을 정말 힘들게 헤쳐나간다.

내가 겪는 평범한 일상은 이러한 고통이 없다는 증거이기에 축복받은 하루다. 집에 가는 태양이 뿡뿡거리며 퇴근하는 것처럼 밋밋했던 오늘을 별 탈 없이 흘러가기에 사랑받아 마땅한 날이 된다.


다시 질문으로 되돌아와서 알맞은 답을 찾아본다.

Q 나는 오늘 무엇을 보았지?

A - 사랑하는 우리 집 꼬맹이들이 1분에 100번씩 '엄마'를 부르며 웃는 얼굴로 나를 찾는 모습을 보았다.

Q 나의 오늘은 기분이 어땠을까?

A - 전적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이들이 있어 나 또한 행복하다


세상에 당연한 매일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길을 걷다가 다리가 부러질 수도, 가만히 있던 세탁기가 고장이 날 수도 있다. 하물며 전등 교체를 외치며 천장의 불이 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아무런 우환 없이 마무리를 지을 수 있다는 오늘은 정말 사랑받아 마땅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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