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종종 회자되는 단어가 있다.
워라밸
일과 삶의 양립을 일컫는 영어 표현의 줄임말 'work and life'이다. 이제는 너무 흔해서 단어만 들어도 무언가 삶의 질이 올라갈 것만 같은 힐링의 단어이다. 하지만 가정주부라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말이 그저 사치의 표현일 뿐이다.
물론 틈새 시간을 알차게 활용하면 아주 못할 것은 없다. 하지만 주부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듯 아이들에게 일정 시간을 설정하여 엄마에게 말을 걸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부터가 책임을 회피하는 행동이다. 밥시간이 되면 당연스레 식사 준비를 해야 했고, 집이 더러워지면 응당 청소기를 돌리며 정돈을 해야 했다. 그것이 내가 해야만 하는 매일의 미션 중 가장 우선이 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가운데 가정주부에게 워라밸 따위는 사치였다.
당연하게도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워라밸이 삶의 질 문제로서, 체력 보충의 의미로서 중요하다. 그런 맥락으로 보자면 집에 있는 나에게도 엄라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퇴사를 결심하게 된 주된 이유가 가정의 안정과 엄마로서의 역할이었기에 이제 와서 이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양심이 없었고, 언감생심처럼 들린다. 이제는 직장이 아닌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이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두가 잘 살기 위해 결정한 일이라 할지라도 집 안에서 중심을 지켜야 할 내가 아프다면 그건 여러 가지 의미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는 엄라밸이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고 외치고 싶다.
아이들의 기상과 함께 엄마의 출근은 시작된다. 취침과 함께 퇴근이 이루어진다. 때로는 뒷정리 등을 핑계로 야근 또는 철야까지 당연하게 해야 될 때도 있다. 그런데 이 또한 내가 심신이 건강할 때의 이야기다. 만약 이 중 하나라도 흔들린다면 흔히 말하는 '웃는 낯'은 노력해도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휴가를 내거나 반차를 쓰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나의 엄라밸은 직접 찾아야만 한다.
혼자 노는 것을 극도록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이 있다 보니 처음에는 가족 모두가 잠든 시간을 이용했다. 그런데 늦은 밤의 특성상 조용하니 놀기는 아주 좋았지만 다음날 기상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당연히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힘들어졌고, 등교 준비, 아침 식사도 헐레벌떡 해치우게 된다. 함께 손을 잡고 집을 나서서 학요 앞에서 눈을 맞추며 잘 가라고 인사는 하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영혼이 가느다란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행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며칠 하다가 그만두었다.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것을 고작 하루, 이틀만 해 보아도 온몸으로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두 번째 방법으로 넘어갔다. 새벽이었다.
물론 남들이 단잠에 빠져있는 고요한 새벽에 편안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나 또한 단잠의 달콤함을 알고 있기에 의지력 만으로 모든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정말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7시 언저리까지의 시간. 고작 2시간가량의 찰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달콤한 이부자리를 뒤로하고 일어나기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고 마음껏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학기 중에는 모두가 각자의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니 오전을 야무지게 더 이용할 수 있었고, 방학 때에는 둘째가 낮잠을 잘 때 등 자투리를 이용하여 개인 시간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엄마로서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핀잔을 주거나 잔소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상을 지내면서 매의 눈으로 찾아본다면 엄마로서의 역할을 하는 가운데 틈틈이 자신의 라이프 밸런스를 위하여 엄라밸 구역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책을 읽고 싶으면 아이들과 도서관에 가서 읽었고, 글을 쓰고 싶으면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썼다. 그리고 무엇보다 친절한 남편의 도움을 받아 가끔 주말에 3시간가량의 짤막한 휴가를 받았다. 그 시간에 집 근처 커피숍에서 달달한 음료를 마시면서 자유시간을 누리며 고갈된 에너지를 채웠다.
가끔 주변의 주부들을 볼 때면 아이들을 남편에게 떠넘긴 채 자신의 멘털 힐링을 위하여 시간을 쓰는 일에 죄책감을 받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한창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데 어떻게 본인의 역할을 모른 척할 수가 있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아프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하냐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과 생각이 조금 달랐다.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어떻게 엄마가 24시간 로봇처럼 하루종일 아이 곁에만 머문다는 말인가. 물론 나 또한 아이가 열이나 거나 아프다고 할 때에는 밤을 새워가며 매시간마다 열 체크도 하고 온몸에 물수건을 연신 닦아주며 보초를 선다. 이는 당연한 일에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건강할 때에는 아빠에게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기꺼이 만들어준다. 당연히 엄마의 손길이 중요하다는 부분에는 백 번 인정한다. 그러나 아이는 두 남녀가 함께 만든 결실이다. 내가 독차지할 필요도 그래야 할 의무도 없다. 당당하게 남편에게 그 의무를 함께 가져가야 함을 각인시키자.
우리가 사는 사회는 21세기이다.
남존여비 사상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고등교육을 받고 있고 동등한 위치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그런 세상이다. 하지만 육아라는 부분에서는 여전히 엄마의 책임이 당연시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그에 따른 문제로 인하여 일을 그만두고 가정주부의 역할을 도맡았다. 물론 그것에 대한 내 입장은 나의 선택이었기에 누구의 탓을 하지 않는다. 또한 본인의 결정에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후회는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 챙겨주지 않는 나의 엄라밸을 스스로 찾아내었고 남편 또한 인정해 주었다.
개인적으로 집으로 들어오고 책을 읽으면서 그저 엄마로만 남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자신의 숨구멍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찾은 나의 엄라밸 구역을 정했다.
여전히 많은 이에게 인기는 없어도 블로그도 하고 싶고, 브런치에 글도 쓰고 싶었다.
여기에 책도 읽고 싶었고 무엇보다 보람되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물론 내가 하고 있는 가정주부라는 일 또한 '보람을 느끼다'의 영역에 들어있기는 하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싶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주어진 환경에 대해 불평, 불만만 늘어뜨리며 음침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엄라밸 구역을 찾아 읽고 싶은 책들을 읽고 더 많은 생각을 했다. 어두운 응어리들을 글을 쓴다며 끄적거리다 보니 많은 생각들에 깊이가 더해져 갔다.
자신이 쓰는 모든 시간에 대해 가치를 논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내가 하는 것은 마땅히 그럴 수 있는 것이었고 더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나오는 결과들이었다. 희생을 당연스레 생각하는 순종적인 모습을 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고 표현하고 싶다. 주어진 환경에 어두운 물감을 뿌리는 모습보다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의 미래를 꾸려가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늘 노력하는 뒷모습을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엄마들이 당연하게 보여준다면 미래 세대를 책임질 아이들의 세상은 보다 밝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