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역 근처 루프탑 카페에서 올려다본, 잿빛으로 물든 근사한 하늘에 우리는 행복했다. 그날 마지막 데이트가 될 줄은 몰랐다.
늘 피곤해하는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도록 배려하면서. 산뜻하게 우리가 만나려면 그만의 공간과 시간이 충분히 주어져야 했다. 나는 진정 고요하고 온화한 정서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가끔 책상 위, 거울에 내 얼굴이 비친다. 예전에 나는 잘도 토라져 있었다. 볼멘 얼굴이 참 볼썽사나웠다. 인색하다며 그까짓 몇 푼으로 향기 나는 남자를 놓칠 뻔했다. 낯 뜨거운 인지 습관을 지금은 그저 흘러가게 놔둔다. 책상 위에 올려진 거울에는 편안한 여인의 모습이 있다.
‘어떻게’와 ‘왜’에서 알고자 하는 건 같아 보이는 데 뭐가 다른 것일까? ‘왜’는 왜 이것이 아니라 하필 저것이냐고 따져 묻는 것? 나는 왜 (이게 아닌 거야)? 에서 어떻게 (그런 거야)?로 바꿔 물어보게 되었다. 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무표정에서 생기가 돌았다.
나는 그가 묵묵히 해온 헌신을 알아주는 인정의 말을 하였다. 그동안 미쳐 몰라본 것에 미안하다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는 확실히 달라졌다. 목소리는 업 되고, 제법 말도 많이 하였다. 나는 이제야 우리가 맞춰진 것 같다고 말했다. 사귄 지 만 1년이 되면서, 제대로 연애란 걸 한다고… 그는 조용히 웃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게 문제인가? 언제고 급 다운되는 나에게 그는 익숙해진 건인가? 혹은 기다리는 지금의 나에게 익숙해진 걸까? 아니면 이 모든 것에 길들여진 내 마음인가?
변화된 관계 속에 숨어 있던 ‘문제’는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점점 연락이 뜸해졌다. 하루 종일 일하고, 갈라쇼에 참석하느라 지쳐 있겠지. ‘잘 자’라고 잊지 않은 인사에 고마워해야겠지. 너무도 바쁜 남자, 빨리 에너지가 소모되는 남자를 만나는 것뿐 잘못된 건 없었다.
큰아들이 독립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땀 한 바가지 흘렸다고 그에게 알렸다. 내 마음이 하루 종일 어땠을까, 그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내게 무관심한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퇴근할 때 늘 하던 전화도 그날은 없었다. 웬일인지 빼먹지 않고 한 저녁 콘퍼런스 콜도 그는 취소했다.
누구와의만남이길래... 늘 해 오던 문자도 전화도 모두 잊은 채, 무엇을 하고 있던 걸까? 기다리다 그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는 연락하는 걸 깜빡했다고 미안하다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뭔가 무척 어색해하면서.
아들의 독립을 축하한다고 혹은 고생했다고. 위로의 말 한마디 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외롭다.... 하지만 난 달라졌다. 탓하는 대신 나와 다른 그를 받아들였다.
“괜찮아! 해야만 하는 건 없어. 당신도 나도 그 누구도 잘못된 게 아니야.”
칭찬이든 위무든 그에게 관심과 애정을 느끼고 싶은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거다. 비행동에 의미는 없었다.
“어제는 더워서인지, 거의 꼴딱 밤을 새웠네.
큰애 홀로 보내면서
내가 대견한 건지
못해준 게 짠~한 건지
나 혼자 '토닥토닥 '하기는 했지만.
슬픈 건 아니었는데
아무튼 어제는 너무 더웠어.
매일 아침, 내게 잘 잤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감사하다.
너무 힘이 돼요.
오늘도 파이팅. ”
그는 답이 없었다. 내심 어제 센티한 마음을 가볍게 표현한 건데, 그의 신경을 건드린 걸까?
사람들은 그를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본다. 그래서 나도 반하게 되었다. 다정하게 보이는 것과 진짜 다정한 것은 뭐가 다른 걸까? 친절하게 웃고, 상냥하게 말 하지만, 그는 관여하지 않는다. 최근나의 일상에 그는 침묵했다. 나의 엄마의 췌장암 검사에도, 큰애 독립도, 오백 만원 손해 본 일도, 그 외 크고 작은 나의 모든 일에 질문을 멈췄다.
회사에서 일 마치고 전화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완전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그냥 형식적으로
“나 퇴근한다.”
더 이상 얘기를 주고받는 걸 귀찮아한다는 느낌이 확 왔다. 뭘 물어봐도 건성으로 답했다. 빨리 서둘러 끊으려 했다. 아니 이럴 거면 왜 전화를 하는 거야? 뭐가 다정하다는 거지? 말과 표현이 서툴 수 있다. 그 속에서도 진정함은 알 수 있는 거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평양냉면을 함께 먹어본 적이 있었나? 일 년을 사귀면서 한 번도 내 옷을 사러 간 적이 없다니. 그의 아내가 되면 다정해지려나?
난 잘 모르겠다. 내가 욕심쟁이라서 그런 건지, 예민한 건지, 일 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난 혼란스러웠다. 행복하기는 어렵고 불행해지기는 쉬운 건가? 열흘 간 헤어져 있으면서 근본적으로 서로의 다름을 알게 되었는데. 무엇을 더 알아야 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