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예원 Feb 22. 2021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II

우리 집 바로 앞에 탄천이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를 하염없이 들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며칠 전 ‘마리끌레르’에서 그의 별자리 운세를 보게 되었다.


“옛 연인이 갑자기 연락을 해올 수 있다.

헤어졌던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길 권한다.

한편,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면 간식의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자.”


그를 의심한 건 아니지만, 전 여자 친구에게 연락이 올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다이어트하느라 밀가루를 전혀 먹지 않으니…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운세가 불길하게도 맞는 것만 같았다. 루틴처럼 형식적인 연락만 주고받는 문자와 통화에서 거리감마저 느꼈다. 나의 상상은 극대치로 달렸다. 더구나 주말에 그가 전주에 내려가느라 만나지도 못했다.


어느 금요일, 평소처럼 만나려면 이미 연락이 와야 할 시간이 지났다. 문자 하는 걸 또 잊었단다. 확실히 달라진 것 같은데, 뭔 일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으면 도저히 안될 것 같았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니야. 달라진 거 없어.”


드디어 눈물이 터졌다. 꼭꼭 참아왔던 애달픈 마음이 수도꼭지 터진 마냥 흘러넘쳤다. 달라진 게 없다는 그 말에 왜 눈물이 멈추질 않은 걸까?


다음날이 되었다. 또 다음 날, 그다음 날. 나는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염려나 불안이 그를 더 멀리할까 두려워, 속으로만 삼켰다. 아, 어서 시간이 흘러갔으면 좋겠다. 올해가 가기 전 그는 결혼을 결정한다고 했다. 그때까지 그의 말처럼 달라진 게 없이 우리가 쭉 연인이기를 바랄 뿐.


기다림은 허무하다. 잘 자라고, 잘 잤냐고, 점심 잘 먹으라는, 매일 묻는 안부가 소중하다. 이러다 하나라도 뜸해지면… 기다림의 끝은 처량하다.


“네가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무엇 때문일까.

확실히 예전보다 내가 바빠지고,

그 이유로 표현을 적게 해서 그렇겠지.

그런데 나는 왜 예전보다 표현을 적게 하고 있을까.

단순히 바빠져서 일까, 다른 이유가 있을까..


틈틈이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한 거 같아.

하지만 아직 그 생각, 이 사랑에 대해 결론을 내진 못했어.

아무 일 없는 거냐고 물어볼 때마다,

아무 일 없다고 답했었는데..

결론을 내지 못해서였어.

스스로도 많이 혼란스러웠고..

미안해.

갑작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미리 톡 보내.”


갑자기 왜??? 며칠 전 함께 골프여행을 다녀왔고, 예전처럼 보채거나 토라지지도 않는데…. 어느 날부터 소원해져 별일 없냐고 물어본 건데… 심각하게 파고들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오히려, 나보단 그의 상황이 달라진 건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이 그의 눈에 들어오거나... 누군가를 만난다고 연락을 깜빡했다며 어색해한 그 날, 화요일 이후부터인가?


그의 친구 가족들과의 여행에 동참하면서 우리 미래가 실현되어간다고 여겼다. 또 있는 그대로의 인정으로 커뮤니케이션도 유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2주 만에 갑자기 이별이라니! 느닷없이 시간을 갖자니!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불협화음으로 다툼이 있지도 않았고, 특별한 이슈가 없는 지금. 우리가 헤어진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인 걸까?


별의별 생각을 하다, 함께 본 ‘김동욱 찾기’ 뮤지컬이 떠올랐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운명이다.’ 그도 이번이 마지막 사랑으로, 결혼을 결정하겠다고 했는데. 하필 몇 달 남지 않은 중요한 타이밍에!


못 견디게 그립고 안 보면 죽을 것만 같은 마음이 사랑이라, 고민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는 사랑하기 때문이라니.


이별을 예고한 톡을 읽고 그를 만났지만, 설마 끝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처럼 아무런 감정 없이 떨어져 있자고 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


그와 헤어지자마자 뼈아픈 고통이 시작되었다. 일단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하루하루 내 몸은 메말라 갔다. 갑작스레 찾아온 이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대로 마냥 아파할 수만은 없었다.


엄마는 야위어가는 딸을 위해 고향 남해에서 장어를 배달시켰다. 시래기를 된장에 무쳐, 장어와 함께 고았다. 푹 고운 장어를 믹서기에 갈아, 먹기 좋게 장어탕을 만들어 주셨다. 엄마를 위해서라도 난 먹어야 했다.


“엄마, 미안해.”


한 숟갈을 못 넘기고 난 그만 울고 말았다. 엄마도 같이 따라 우셨다. 엄마는 딸이 아픈 게 너무 속상하다며, 아프지 말라면서 우셨다. 나는 계속


“미안해, 미안해”


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더 아프고 싶어, 조금만 더 아파할래’ 하며 울었다. 엄마는 말없이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 노래만 계속 틀었다.


나는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닌 다른 것으로 대체할 것을 찾아야 했다. 유머러스하게 연애 에세이나 써볼까? 한 말이 슬픈 이별 이야기로 바뀌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담긴 그의 마지막 톡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럴 때마다 몸이 녹아내리듯 서글퍼졌다. 가끔 말끄러미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가 생각이 났다. 그의 눈동자에 나의 외로움이 있었다. 그의 눈에 담긴 나의 쓸쓸함을 봤을 때처럼 서글픔을 다시 느꼈다. 내 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아픔은 바람처럼 형체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하지만 쓰러질 만큼 서글픔의 고통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흘러내리는 천(川)을 보면 좀 나을까? 나는 자주 나가 걸었다. 우리 집 바로 앞에 탄천이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를 하염없이 들었다. 아직은 춥지 않아 저녁에도 걸었다. 이지러진 투명한 달이 천(川) 위를 감돌았다. 갈 곳을 잃은 영혼처럼 바람에 비벼대는 잎새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기억이란 참 이상도 하지. 그를 만났던 당시 풍경은 중요하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꽃피던 우리의 이야기는 잠드는 늦은 시간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그 많은 소중한 얘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기억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던 그때의 풍경이었다.


목동역에 내려 그를 만나기 전까지 걸었던 길, 고르지 않게 배열된 보도블록과 네온사인 간판들, 차가움을 머금고 내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했던 바람 냄새, 50M쯤 앞, 그를 알아보자마자 난 달려갔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으나, 남의 시선을 의식한 그는 언제나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가까이 밀착해야만 맡을 수 있는 불가리 향수의 향을 나는 깊게 들이마셨다. 그걸로 만족하며 팔짱을 끼고 걸었던 거리가 눈에 선했다.


스르르 잠이 들면서 기억과 상념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나의 의식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온전히 그의 생각으로 채우고 싶었다. 그와 함께 잠이 들고, 그와 함께 깨어나는 삶을 나는 나 홀로 채우기 시작했다.


이전 23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