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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원 Feb 24. 2021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슬픈 체념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슬픔 이후 가능성으로 전환된다면, 찬란한 슬픔은 이런 것일까?

 

어디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걸까? 그동안의 기억이 흩어져 버리면 어쩌나 간직해온 사진, 영상과 메모를 살펴보았다.

 

“네가 나를 칼로 찌르고 갔어.” 그를 내려놓고서야 숨이 쉬어진다고 했을 때, 받은 충격을 이렇게 그는 말했다.


“칼로 나를 푹! 찌르고!”


천천히 다시 말하며 그는 사케를 벌컥 들이켰다. 피가 솟구쳐 서서히 죽어가는 그를 상상했다. 난 묘한 쾌감을 느꼈다. ‘나를 사랑한 게 맞았어!’ 다시 만난 그날 밤 우리는 오래도록 술을 마셨다. 12시가 넘은 시각, 우리는 나의 집까지 걸었다. 거리는 한산했고, 여름이 시작된 밤공기는 청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날을 그가 기억이나 할까? 그의 두 손안에 담긴 나의 두 볼,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고인 눈물, 가늘게 떨린 나의 속눈썹, 우리의 입맞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을 나만 홀로 기억할 때, 나만의 것이 되는 순간이 너무 외롭다. 우리 둘만의 기억이 아닌 것이 슬프다.


재회 이후, 주말에 만날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나를 위해 선약을 다른 날로 옮기지 않는 그에게 나는 좌절했다. 나의 반응에 압박을 느낀 모양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전해져 온 건 그의 한숨이었다. 뭔가가 잘못되었고 그의 표정 또한 일그러져 있을 것만 같았다. 위태로운 무게에 휘감겨 그는 아득히 멀어져 갔다.


빗나가는 말을 정정하려니 나는 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렇게 되면 처음에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쫓고 쫓기는 듯한 숨 막힘에 난 그만 울먹거렸다. 말로 내뱉으면 그 순간 완전 사소해지고 평범해지련만. 하고 싶은 말은 묵직한 기체 덩어리로서 영영 몸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며칠이 지나 그의 아파트에서 통화로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었다. 어떻게든 대화를 계속하려 했지만 거기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잔물결 치듯 어깨는 떨렸고, 그는 말없이 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눈물과 뜨거운 입김으로 그의 셔츠는 눅눅해졌다. 그는 울음을 그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그리고 우린 잠이 들었다. 새벽에 깬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등을 보이며 누워 있는 그를 보았다.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우리의 입술은 모든 언어를 잃었다. 몸도 얼어붙은 듯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 이후, 그는 나에게 예전보다는 덜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랑은 하지만, 여전히 내게 화가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본능’과 나의 ‘본능’의 전혀 다른 ‘길’을 알아서인지, 그의 말과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나를 자유롭게 하였다. 나는 그가 좋았고, 그의 사랑을 그럼에도 느꼈다.


그는 무언가가 두려웠던 걸까? 그의 사고방식, 알고리즘 작동방식이 뭔지 모르는 이상, 아니 알아도 그가 아닌 이상, 그 무엇도 부질없었다.


그는 내가 왜 자기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여러 번 말했다. 이유 없이 좋아한다는 게 이상한 건가? 사랑하기 전 고려는 조건이 될 뿐이다. 정체성에 합당한,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파트너를 고려한다면, 사랑의 대상이기보다는 사랑의 조건이지 않을까?


그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를 여전히 나는 모른다. 차분하고 지적인 남자에게 끌리는 게 이유라면 이유다. 나의 정체성에 맞는 ‘짝’에 해당되는 것을 나도 하나 들자면, 단체에서 존경받는 공인인 그의 아내라는 포지션, 이 상상이 나는 무척 만족스럽다. 나의 외로움보다 남들이 날 부러워하는 것이, 행복보다는 행복해 보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것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무의미한지! 오늘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다가도 내일이 되면 역겨워하고, 다음 날이 되면 바람에 날리고, 땅에 묻히고 만다. 의미를 부여하는 그 의미는 허약하고 덧없기 마련이다.


그와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 성격유형의 ‘본능’에 대해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에게 처음처럼 담백하고 쿨한 태도를 유지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필요 이상으로 집중하고 말았다. 충분히 그가 밀어내고도 남을 정도였다.

 

상실감을 경험하는 것보다 탓하고, 화내고, 외면하는 게 더 쉽다. 지금의 고통이 두려워 더 큰 고통을 선택하는, 공연 없는 이야기에 혼돈의 질서를 부여하면서 말이다. 어떻게든 그를 이해하려 했다. 아니 내가 나를 납득시키고자 하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헌신하고자 하는 게 무엇일까?

세상의 변화, 예술 문화 공헌으로 자기 성취를 꼽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가장 사랑했던 남자로 남길 바랄까?”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만일 불쾌한 일을 경험할 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거기에는 고통이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애수를 경험하되 슬픔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집착을 품지 않는다면, 비통을 느끼지만 정작 그것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 실제로 애수 속에는 슬픈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잠시 머물고 싶은 감각과 생각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풍요를 시름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이별의 두려움, 사랑의 상실감, 사무친 그리움이 올라오게 내버려 두고 있다. 서글픔이 눈물로 솟구친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저항이 잠시 머물다 지나간다. 지금 내리는 눈물처럼 흘러가게 허용한다.

 

집착이라고 하는 나의 욕심, 정체성, 의미. 이 모든 저항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다. 온전히 나는 나에게 공간을 주었다. 있는 그대로 선택하는 것, 못 견디게 서글퍼하는 나 자체로 있게 한다.


슬픈 체념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슬픔 이후 전환되는 무엇이라... 찬란한 슬픔이란 가능성을 염두한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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