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예원 Feb 27. 2021

터콰이즈 블루

나의 컬러 이름은 터콰이즈 블루. 스스로 자립하는 힘이 있고,  나와 타인의 경계를 앎으로써 오히려 더 유연해질 수 있는 에너지를 담은 색이란다.


가을이 짙어가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역시 가을 하늘이다! 청아하게 밝은 빛깔, 터콰이즈 블루.


누군가의 포근함이 그리운 계절, 스웨터를 입으니 가을 냄새가 났다. 일요일 오후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는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 텐트를 치고, 와인을 마시는 풍경이 정겹다. 우리도 저랬는데… 그와의 추억이 스치듯 떠오른다.


산책 길에 메마른 낙엽을 밟으니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바삭거리는 마른 소리가 좋아서 나는 계속 걸었다. 이리도 근사한 가을을 홀로 만끽하다니… 함께 누리고 감사할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쉰이 되도록 무엇을 하고 살았나.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책임을 통감했다.


진정한 용서와 회복이 나로부터 라는 것… 나의 결핍에 몰두해 계속 걸었다. 결여가 과거의 상처에서 나온 거라면 어디서 비롯된 걸까? 그를 만나기 전, 이혼 후 연애와 이별, 어쩌면 더 오래전, 이미 잊어버려서 생각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로부터 온 것은 아니었을까?


“부족해. 후졌어. 촌스러워. 시시해. 가증스러워. 역겨워. 고약해”


이런 단어가 튀어나올 때마다 나도 모르는 공포에 숨고 싶었다. 나는 환영을 보듯 상처 받은 어린 나를 떠올렸다. 그때 일어난 사건과 지독한 감정을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과 닿으려 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단 하나의 분명하고 진정한 목소리를 발견하고 싶었다. 나의 자아, 거기서 우주의 모든 의미와 힘이 나온다는 것을 믿으며.


 “너무 늦은 건 아니지?

예전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사과하기도 전에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언제부터 얘기하는 게 좋을까?

초등학교 1학년,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 왔을 때 그때 말이야,

친구들 앞에서 대표로 책을 읽은 적이 있었어.

‘음악’을 ‘엄악’이라고 사투리로 발음해서 반 전체 아이들이 책상을 치면서 웃어댔지.

난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어.

그 날 이후로 표준말을 쓰기 전까지 실어증 환자처럼 말을 못 했어.

나는 촌스럽고 후진 아이가 되었지.


아버가 언니에게 영어를 가르쳤을 때,

대답을 못하는 언니 대신 나는 재빠르게 답을 하곤 했어.

수업이 마치자마자 아버지한테 꾸중을 들었지.

언니 체면을 세우기 위해  잘난 척한다고 오히려

나를 더 야단치셨어.

억울해하면서도 계속 그랬어.

그렇게 혼나면서도 튀려는 걸 왜 멈추지 못한 걸까.

이런 내가 얼마나 못마땅하셨을까?

아버지한테 충분하지 못한 딸이었어.

철딱서니 없는 못난 아이로 자랐던 거야.


아, 얼마나 힘들었니?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니?

그때 놀렸던 친구들, 역정 내신 아버지

그들의 잘못이 아니란다.

나의 잘못도 물론 아니고.


모두가 날 피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가 의미를 만들었어.

부모를 원망하고, 친구를 욕하고, 환경을 탓했어..


이제 깨닫게 되었단다.

수치심과 모욕감, 화, 절망.

이 모든 감정을 부여잡고,

형편없는 결함이 많은 열등감 덩어리로

나의 진실인양 살아왔던 거야.

정말 미안해.

사과를 받아 줄 수 있겠니?”


나는 나에게 쓴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폭포수와 같은 눈물이 솟구쳤다. 덕지덕지 붙은 부정적인 의미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은 상처가, 족쇄처럼 짓누르고 괴롭혔던 기억이,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 나간다. 시원한 가을바람에 허물이 날린다. 있는 그대로의 투명함이 드러난다.


난 나와 사랑에 빠졌어!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바랬던 '짝'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걸 깨달은 거야!”


유년시절, 바람이 불면 연을 날리곤 했다. 저 멀리 날아가는 연을 보며 어렴풋하게 자유를 꿈꿨는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연처럼 살고 싶어 한 건 아닐까? 큰 가로수에 걸려, 꼼짝달싹 못할 때, 귀인이 나타나 날 구원해주길 바랬는지도… 어둑해져 땅거미가 내릴 때, 연은 비로소 나를 만났다. 나를 떠나 누군가를 찾아 헤매느라 고단했을 텐데… 황량한 나를 묵묵히 기다린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의 컬러 이름은 터콰이즈 블루. 컬러 테라피스트 선생님이 추천한 컬러이다. 날 보며 늘 가장 밝은 빛이라고 느끼셨다고… 그럴만하다면서, 스스로 자립하는 힘이 있단다. 나와 타인의 경계를 앎으로써 오히려 더 유연해질 수 있는 에너지를 담은 색이란다.




한의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얼굴에 생기를 가득 담고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마치 바깥세상으로 막 뛰어나온 새내기처럼. 온몸으로 싱그러운 생명감을 분출하면서! 스피드를 즐기며 신나게 달렸다. 지나가는 사람과 산책하는 강아지 사이로 리듬을 타면서.


찰나, 20m 앞에서 주춤거리는 강아지를 보았다. 강아지와 주인을 연결하고 있는 끈, 이 풍경은 커다란 유리벽 마냥 정지해 있었다. 그들 사이를 통과할 어떠한 틈도 없었다. 순간 브레이크를 밟았고, 그 충격으로 나는 넘어졌다. 사고는 피했지만 통증은 컸다. 그저 다친 몸을 웅크리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강아지 주인은 거듭 죄송하다고 말하며 나의 상황을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난 조용히 혼자 아파하고 싶었다. 그만 가보라고 말했지만, 그는 연락처를 드리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 타박상인데 무슨 연락할 일이 있겠냐 싶어 괜찮다고 말하는 데, 무릎이 패인 곳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10여분 정도만 쉬다 가면 될 듯싶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갈 때까지 30분이나 넘게 떠나지 않았다. 그제야 강아지는 괜찮은지, 부딪힌 곳은 없는지 물어보았다. 끝까지 내 옆에 있어준 그를 보면서 나는 감동을 받았다. 우리 세 아들이 생각났다. 우리 아이들도 이 학생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기를 그렸다. 어떤 잘못이든 실수든 책임으로 진정하게 사람을 대하기를….


며칠 쩔룩거리긴 했지만 이토록 감사와 관대함으로 가득하다니! 난 요즘 행복하다. 예쁨 받으려 몸부림치지 않아도 된다니! 사랑받고자 특별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게 너무 좋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노력이 필요치 않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남들이 원하는, 세상이 요구하는 이미지를 충족하고자 살았다. 남의 칭찬과 인정이 뭐라고. 내가 만든 인위적이고 불완전한 정체성, 가면을 쓰고 끊임없이 나의 영향력을 확인받고자 했다. 진정한 나 자신을 구분한다는 것은 괴로워하는 나와 진정성과의 씨름이었다. 나는 드러내거나, 숨기거나, 척하느라 바빴다.


이제는 즐거운 게임이다. 얼음과 불, 양면성이 모두 나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37억 개의 완전히 독립된 세포가 모여 나를 이루고 있는데, 나는 하나가 아니다. 나의 모순과 위태로운 감정, 예민한 감각과 사고, 모두 인정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사랑은 주고받는 물물교환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사랑은 존재 그 자체라는 것을! 사랑을 얻기 위해, 사랑이 일어나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이럴 때 사랑의 의미는 왜곡된다. 모자람을 채우려 사랑받기 위해 사랑을 했던 것이다. 사랑은 성취되거나 요구되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었는데 말이다.


끊임없이 나를 사랑하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영향받지도, 소멸되는 것도 아니다. 진짜의 나로 내가 산다면, 그 어떤 자극에 무엇이든 자연스럽고 고요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체로 눈부시다.


나는 나 자신을 찾게 되어 건강해지기 시작했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 것같이, 터프한 시간을 이겨낼 방법은 결코 드라마틱하게 오지 않는다.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


“무엇이 내게 영감을 주는가?

무엇이 나를 이토록 가슴 뛰게 하는가?

내가 꿈꾸는 삶은 어떤가?”


진정 나는 너그러우며 사려 깊고 온화하고 싶다. 정말 후회 없이 내가 원하는 진짜인 삶을 사는 데 쏟아보련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이전 26화 Hustle lif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