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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원 Feb 28. 2021

노란 벽돌 길

원하고 갈망하고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지금, 여기에서 얻을 수 있다.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이미 우리가 갖고 있던 눈물 나도록 그리운 소소한 일상.



두 달이 지나도록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잘 지내냐는 톡도 오지 않았다. 새로운 일로 나는 바빠졌지만, 단 하루도 그를 생각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잠들 때까지 몸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면서, 우리의 추억을 떠올렸다. 가끔은 몹시 불안한 마음에 휩싸이곤 하였다. 혹시나 기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실해 버린 게 아닌가 하고. 소중한 기억이 고스란히 어디론가 사라지면 어쩌지? 다른 곳으로 옮겨져 알 수 없는 형태로 변해 버리면 어떻게 하지?


지난 우리의 경험이 잊히고 희미해졌지만 점점 멀어져 가는 그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메모리는 지워져도 감정은 여전히 남아, 전혀 몰라보는 그를 만나도 다시 끌릴 것만 같았다. 마치 ‘이터널 선샤인’ 영화처럼.


시간이 헛되지 않기 위해 나는 클래스를 하는 틈틈이 글쓰기에 집중했다. 처음 그의 존재를 알게 되고, 사귀고 사랑하고 지금에 오기까지. 추억하고 싶은 우리의 이야기 속에 머물고 싶었다.


아무런 소통 없이 떨어져 지내는 지금  사형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별을 향해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모든 마음을 쏟아내지 않으면, 장기 어딘가가 고장이 날 것 만 같았다. 작별의 순간, 박제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아, 하염없이 써 내려간 것이다.


누군가를 두고 각별한 마음을 갖는다는 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본능 같은 끌림이었을까.  외로워서 그의 품을 쫓았던 걸까? 뭘 안다고 무심한 그를 내 맘속 깊은 곳으로 끌어들인 걸까? 아, 세상은 내가 만든 것, 그의 책임은 없다.


나보다 자질이 뛰어난 누군가와 사랑한다는 행위는 분명 삶의 확장이고 새로운 발견의 기회였다. 더구나 그는 진솔함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라서 내게는 특별했다. 내가 솔직한 척을 할 때마다 그는 교묘하게 핀셋으로 딱 끄집어내는 예리함을 가졌다. 때때로 나는 무장 해체되는 것 같아 차라리 속 편했다. 호흡 같은 자유가 덤으로 주어진 것 같아 좋았다.


그럼에도 나 자신이 텅 비고 무가치하다는 내면의 깊은 두려움, 불안의 보상으로 애정을 확인하려 했다. 가련한 나를 알게 된 시간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사랑받을 수 있음을 너무나 늦게 깨달은 건 아닐까? 그가 아니라 다른 남자를 만났어도 지긋지긋한 과정을 겪었을 게다. 그는 사랑의 대상이었을 뿐. 나는 그가 아닌 나 자신에게서 상처 받고 있었으니까.


서로 맞춘다는 것은 어쩌면 내 방향으로, 혹은 그의 방향으로 끌려는 걸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사랑은 이런 방식으로 맞추기보다, 한 곳을 향해 바라보며 함께 걸어간다는 뜻이 아닐까?


그는 한마음으로 동행할 마지막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지, 찾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런 그를 보면 ‘오즈의 마법사’가 생각이 난다.


양철 나무꾼은 오즈에 도착하면 위대한 마법사가 자신에게 심장을 줄 거라고 믿었다. 허수아비는 뇌를 원했고, 사자는 용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위대한 마법사가 실은 사기꾼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발견하였다.


바로 그들이 바라는 모든 것이 이미 그들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정과 지혜와 용기를 갖고자 한다면 마법사는 필요 없다. 그저 노란 벽돌 길을 따라 걸으며 도중에 겪는 경험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나는 잠시 그와 떨어져 노란 벽돌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나는 몸소 겪으며 나의 한계를 깨닫는다. 그는 나 자신을 만나게 해 주었다.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세상을 향한 연결과 관심의 감각 덕분에,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 해도, 이타적인 행위를 통해서 그는 잘 살고 있겠지. 적극적인 사회 활동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에너지 배분은 그에게 힘을 빼는 것이었으리라. 나와의 결별은 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를 만나게 되면 뭐라고 말할까? 어떤 선택을 할지, 정말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건 우주의 충돌이라고 했던가? 잠깐 머물다 간… 서로를 알기에는 너무나 우주가 광활하다. 그는 관심의 지경을 넓히다 멈추고 떠났다. 나를 들여다본 지점까지가 그가 만든 세상이다.


우리는 많은 세상을 접한다. 세상에는 참으로 무수한 세계가 있고, 모든 세계에는 또 저마다 우주가 있다. 얼마나 상당한 미지의 세계를 남겨둔 채, 몇 가지나 경험하고 떠나는가. 보는 것만 실재하는 세계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곳에 어마어마한 가능성이 있다. 사소한 것도 저마다 지극한 경지가 있는데, 하물며…


요즘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인다.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얘기를 듣는다.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과거의 나는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했던… 함께 있으나 마치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상태였다. 이제는 마음을 기울여 경청한다. 나의 내면세계가 편안해진다. 진정 고요할 때 풍요로움도 발견한다. 주변의 모든 면이 달라 보인다. 더 생동감 있고 입체적이며 섬세하다.


왜 사는가? 에 대한 물음에 답도 가볍다. 태어난 것만으로도 삶의 이유는 충분하다.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삶 자체가 존재 이유다. 행복하려고 하는 순간, 불행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거다. 자아실현이나 뭔가 거창한 일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게 아닌데.


고혹하게 빛나는 백합 한 송이가 아니라, 수북한 안개꽃처럼… 작은 꽃송이가 너무 미미해서 보이지도 않았다. 여기저기 흩어진 꽃망울을 주섬주섬 모으면, 한 다발이 되고, 실체가 보인다.


원하고 갈망하고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지금, 여기에서 얻을 수 있다.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가족, 연인, 친구, 첫사랑, 스무고개, 소꿉놀이, 등목, 수학여행, 편지, 웃음, 낭만, 소나기, 해돋이, 무지개, 불꽃놀이. 이미 우리가 갖고 있던 눈물 나도록 그리운 소소한 일상...


인생이 여행이라면, 다른 이와의 비교는 지치고 피곤하다. 여행의 목적은 도착지가 아니다. 창 밖도 보고, 옆 사람과 얘기도 나누는 과정이라는 걸 난 왜 몰랐을까? 결과로 즐거웠던 건 짧다. 고생스럽다 하더라도 과정을 함께 했을 때 만족은 길다.


남의 행복이 흡사 나의 행복인양 이식하며 살았다. 기웃거리다 기댈 곳을 찾지 못해 우리로 돌아오는 가축마냥 삭막한 세월이 있었다. 유일한 낙은 남자 친구를 만나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 그의 품에서 재가 되어 소진해버리고 싶었다. 잠시라도 현실에 마비될 수 있었으니까.


살아가는 우리의 공통점은 아직도 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환희, 정열, 생동감을 느꼈던 사진처럼 선명한 지점을 알아차려야 한다. 윤태호 작가는 말했다.


“뭉뚱그려져서가 아닌,

명확히 떠올릴 수 있는 그 지점.

셀로판지를 세워놓은 총합이 나라면,

내가 정말 좋아했던 지점,

반짝이고 사라져 버렸지만,

그 레이어드를 끄집어내어 보일 수 있는.”


나도 그 지점에 깨어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꿈꾸어 본다. 무엇에 열정을 느끼는지… 돌파구는 나 자신의 발견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로 인생을 채운다. 내면에 무엇이 있으며 또 어떻게 표출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나도 미처 몰랐던 내 안의 말하고자 하는 것을 끄집어 내자 병이 나았다. 마치 궤도를 이탈해 우주를 유영하다 지구에 안착한... 온전한 평안까?


춤출 수 없다면 인생이 아니라고 말했던가? 나는 무척이나 처절하게, 아프도록 사무치게 춤을 추고 있구나… 이런 몸부림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으로 이끈다면, 훌륭하거나 위대한 사람은 못되어도 자유롭고 충만한 나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잘 익은 상흔에는 꽃 향기가 난다고 했던가? 나의 깊은 상처의 근원과 치유하는 법을 알게 해 준, 이 시간에 감사하고 소중함을 느낀다.


언젠가 스스로 그윽한 꽃 향기를 낼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그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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